창간호 축쇄판 고서점서 발견 쾌재라! 나는 그날 역사를 목격했다
“민족의 얼을 불러일으키는 명문(名文)이었습니다. ‘아! 동아일보가 좋은 분을 모시고 출발했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그 축쇄판은 지금도 제 아파트 서재에 보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박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동아일보 애독자다. 지난해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현재 살고 있는 은평구로 이사올 때 “내가 이사가면 동아일보 독자 1명이 이곳에서 줄어든다”며 다른 신문을 구독하고 있던 지인을 설득해 동아일보 독자로 만들었을 정도다.
“1960년대 고교 3학년 국어교과서에 ‘신문의 사명’이라는 단원이 있었습니다. 언론은 불편부당하게 사회의 목탁이 돼야 하고 그런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지요. 3·1운동으로 인해 탄생했고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 인촌 김성수 선생의 이미지, 이런 것들을 볼 때 동아일보는 그런 언론의 사명에 부합하는 신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게 됐지요.”
1974∼75년 유신정권이 당시 정권에 비판적인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자 독자들이 돈을 내 ‘백지광고’를 내는 것을 지켜봤을 때는 “아, 이 신문이 바로 민족이, 국민이 지켜야 할 신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신문 읽기를 적극 권유한 선생님이었다. 사설을 꼼꼼하게 읽고 좋은 기사를 오려서 정리하는 게 국어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대 사회가 신문보다 TV 등 영상매체에 쏠리는 경향이 못마땅하다. “젊은이들이 세상일을 성찰하고 깊이 있는 정보를 얻으려면 신문을 읽어야 하는데 점점 더 그렇지 않게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외형적으로만 잘사는 것보다 조금 부족하게 살더라도 진중하게 자신의 정신적 윤리적인 부분을 연마하려면 신문을 읽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하루라도 신문을 읽지 않으면 병이 날 지경이었다는 그에게도 신문을 읽기 싫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신문과 다퉜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신문 보기가 겁이 났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선뜻 문을 열고 나가 신문을 가지고 오기가 꺼려졌어요. 사실관계를 떠나 시대의 비극이었지요. 세상이 둘로 갈린 듯한 느낌이었어요. 요즘은 좀 나아진 것 같습니다. 어떤 사회든 누가 옳든 극한 대립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24일 오전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10층 일민라운지에서 만난 그는 동아일보에 거는 기대를 피력했다. “한국을 빛낼 걸출한 문필가가 동아일보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장덕수 선생을 비롯해 동아일보 지면에서 빛을 냈던 문필가들에 버금가는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창간 90주년을 맞은 동아일보가 언제까지라도 초심(初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3·1운동 이후 민족지로 출발한 동아일보가 창간 정신, 그 초심을 항상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시대의 변화에도 적응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심에 바탕해 세상의 평지풍파와 관계없이 사랑받는 신문, 항상 흔들리지 않는 신문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기원합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