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전 누명 벗게 해준 한국 민주화에 큰 감격”“1974년으로 돌아가도 취재하러 다시 올 것”유인태 몰골 안쓰러워 고기 사먹으라고 준 돈 공작금 둔갑… 독방수감
27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뒤 한 막걸리집에서는 조촐한 축하연이 열렸다. 주인공은 다치카와 마사키(太刀川正樹·64) 일본 일간현대 기자. 몇 시간 전 그는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뒤집어썼던 ‘내란선동죄’ 범죄자라는 멍에를 벗을 수 있었다. 서울중앙지법이 재심에서 그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
동료 일본인 기자들과 한국인 지인에게서 술잔을 건네받으면서 다치카와 기자의 머릿속에는 오래된 흑백필름처럼 탈색돼 버린 지난 36년간의 세월이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머리 위에 제법 흰서리가 내려앉았지만 1974년 그때만 해도 그는 20대 후반의 열혈 기자였다. 엄혹했던 시절 한국의 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하러 온 그는 엉뚱하게 사건에 휘말렸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납니다. 36년 전 일이었다고 믿기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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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카와 마사키 씨가 28일 동아일보사에서 인터뷰를 하며 36년 만에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심경을 밝히고 있다. 박영대 기자
입국 금지가 해제된 1980년대 중반 이후 그는 해마다 서너 차례씩 한국을 찾았다. 주변 사람들이 “한국에 가서 그 고생을 했는데도 애정이 남아 있느냐”고 묻지만 그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한국의 민주화 현장을 취재하러 오겠다. 현장을 봐야 하는 게 기자다”라고 대답했다.
“수배자에 7500원 줬다고 내란선동죄… 쓴웃음만 나왔죠”
아내 피해망상 시달려 결국 이혼… 눈물 머금어
출소 10년뒤 다시 오니 모두 미안하다고 사죄…36년전 투사 넘친 한국
지금은 자신감이 넘쳐… 한-일 가교역할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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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 기사는 보도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더 좋은 취재 기회가 찾아왔다. 1973년 8월 중앙정보부가 일본 도쿄에서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일본에서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큰 이슈가 된 것. 데스크에서 즉시 한국의 민주화 운동 현장을 취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치카와 기자는 “한국에서 현장을 취재하면 민주화 운동 분위기를 생생히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최대한 다양한 사람을 접촉하고 많은 얘기를 들으려 애썼다”고 말했다.
1975년 2월 10개월간의 복역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강제 추방되기 직전 함께 구속됐던 재한 일본인 대학강사 하야가와 요시하루 씨(가운데)와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다치카와 마사키 기자. 동아일보 자료 사진
그는 “일본어 통역을 통해 조사받는 과정에서 혐의가 날조됐다”며 “나중에 공소장에서 ‘내란선동’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등의 무서운 단어를 봤을 때는 너무나 소설 같은 이야기가 내 인생에 펼쳐지고 있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독방에 수감된 그는 재판 전까지 가족은 물론 변호사도 만날 수 없었다. 체포 이후 2개월 만에 법정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남동생, 아내를 볼 수 있었다. 법정으로 들어서는 그에게 아버지가 ‘마사키!’라고 나지막이 외쳤지만 경찰의 제지로 대답조차 못했을 때에는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아버지는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때 저지른 불효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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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 前의원 축하인사다치카와 마사키 씨(왼쪽)가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민청학련’ 사건 당시 인연을 맺었던 이철 전 국회의원의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김재명 기자
한국 법원은 36년간 그의 모든 것을 다 앗아간 뒤에야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상황 보고에 7500원을 ‘취재 사례비’라고 표현한 것은 ‘폭력혁명 수행자금’에 보태라고 표현하기로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며 내란선동 등 혐의에 무죄를,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는 면소 판결을 내렸다.
다치카와 기자는 “그 사건이 인생의 모든 것을 바꿔놨지만 한국을 좋은 곳으로 기억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우연히 마주친 중앙정보부 조사 당시 일본어 통역사부터 인터뷰를 위해 만난 김종필 전 국무총리까지, 출소 이후 10년 뒤 돌아온 한국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미안하다”며 한국의 잘못을 사죄했다고 한다.
그는 “1970년대 중반의 한국은 정부의 억압에 지식인뿐 아니라 길을 걸어가는 보통 사람 한명 한명까지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넘쳤던 곳”이라고 기억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눈에 한국은 아픈 과거사를 떨쳐내고 자신감과 활기가 넘치는 나라로 변해 있었다.
그는 “30년이 지난 과거사를 다시 꺼내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됐는지 느끼고 있다”며 “무죄 판결을 받은 것보다 더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부는 물론 당시 재판까지 받은 자신을 보호하지 않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낼 생각이다. 그는 “한국의 문화를 취재해 일본에 알리는 한일 간 문화의 가교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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