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너무 앞서 간 한국 여배우의 자존심
영화배우 강수연.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지(韓紙)를 소재로 한 현대극이라고 들었다. 어떤 역할을 맡았나. 또 '여인천하' '문희' 등 TV 드라마 이후 3년 만의 작품이다. 공백이 좀 길었는데 소감은….
"천 년을 간다는 한지의 우수성을 찾아가는 방송 다큐멘터리 감독 역입니다. 다른 영화보다 50배는 더 부담이 돼요. 팬들의 기대치에 대한 두려움에,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원래 제가 다작은 아니에요. 이전에도 겹치기 출연은 안 했어요."
광고 로드중
"한 번도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어요. 일부러 제가 출연한 작품은 잊어버리려고 해요. 그래서 시사회 이후 제가 출연한 영화를 안 봐요. 가끔 케이블TV에서 제 작품이 나와도 안 봐요. 불안해서 못 보겠어요."
-상대 배우가 코믹 이미지가 강한 박중훈이라 '조합'이 잘 맞지 않을 것 같기도 한데….
"아니에요. 중훈 씨야말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월드 스타'잖아요. (웃음) 1987년 히트작인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에서도 호흡이 잘 맞았어요. 나이도 동갑이라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요. 재밌고, 노력을 많이 하는 배우죠. 우리 둘은 서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웃음).
-임권택 감독은 배우 강수연에게 어떤 존재인가.
광고 로드중
그러나 임권택 감독의 '배우 강수연'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냉정했다. 임 감독에게 물었다.
-20여 년 전 강수연을 처음 캐스팅 하실 때 어떤 점을 평가하셨습니까.
"암팡지면서도 노련하고, 최선을 다하는 '조선미인'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솔직히 강수연이 '월드 스타'로 도약하지는 못하지 않았습니까.
광고 로드중
-배우 강수연의 인간적 장· 단점에 대해서도 많이 아실 텐데….
"우선 통이 크고 의리가 있죠. 부산 동서대에 제 이름을 딴 '임권택영화예술대학'이 있는데 벌써 4학기째 특강 강사들을 수연이가 다 불러 내려요. 한 번 불러 오려면 몇 백 만 원 이상 주어야 하는 배우 스태프를 수연이가 다 데려와요. 그것도 무료로. 특강료는 대학에 기부하고. 나 참 재주도 좋아."
-이번 영화에 강수연을 기용하게 된 배경은….
"몇 해 전부터 여러 영화제를 같이 다녀오면서 '너도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너한테 맞는 영화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했고, 본인도 전적으로 수긍했지요. 그래서 강수연한테 맞는 역할이 있다면 같이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번에 적역이 나왔어요."
-여배우 강수연이 아직 매력적입니까.
"아역이나 청춘 시절의 강수연이 아니라 '지금의 강수연'이 갖고 있는 매력을 담아내자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강수연의 미모는 이제 영화에서 더는 매력적일 수 없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강수연이 그 나이에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찾아내는 것이 수연이와 저의 과제입니다."
과연 임 감독이다. 한국에서 여배우 강수연에 대해 이렇게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배우 강수연은 한국 영화계의 '여자 보스'다. 그의 카리스마 앞에서는 아무리 인기가 있는 배우들도 꼬리를 내린다. 한밤중일지라도 전화 한 통으로 남녀 인기 배우들을 불러낸다. 설경구 같은 터프 가이도 "누나, 누나" 하며 강수연을 떠받든다. 어느 날 남녀 배우, 감독, 제작자 등 네댓 명이 강수연과 술로 '일전(一戰)'을 벌였다가 모두 '전사(戰死)'했고, 어느 덜 떨어진 영화 제작자 한 사람이 강수연을 호텔로 불러내 수작을 걸었다가 따귀를 맞은 사건은 전설처럼 회자된다. "사실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그런 사람이 하나 둘인가요 뭐"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한다. 그러면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하는 것은 나이와 지위를 막론하고 못 받아들인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도 20년 전 영화 담당 기자를 하면서 우연히 그가 있는 술자리에 합석했다가 주량을 견디지 못하고 내뺀 적이 있다.
인터뷰 과정에서 평소 친분이 있는 변호사 한 분과 함께 셋이서 저녁을 먹고 노래방으로 2차를 갔다. 술기운에 기대 조심스러운 질문 몇 개를 던졌다. '한 춤' 하는 그녀는 노래는 가급적 삼간다. 이날은 팬 서비스 차원에서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와 전유나의 '너를 사랑하고도'를 불렀다. 음치라는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꽤 들을 만했다. 장사익이 부르는 '봄날은 간다'를 듣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김광석과 심수봉 빅뱅 등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한다,
-사랑하거나, 지속적으로 만나는 남자는 없나.
"없어요. 진짜예요. 여배우가 이런 소리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좀 창피하죠. 이 나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사귀는 남자도 없으니. 좋은 감정으로 교제하는 남자가 있으면 결코 숨기지 않겠어요."
-누구랑 사나.
"여섯 식구에요. 여배우와 강아지 두 마리, 그리고 고양이 세 마리. 강아지는 가족 같고, 고양이는 애인 같아요."
-남자한테 덴 적이 있거나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닌가.
"정신적으로 환멸을 느낀 적은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예요."
-독신주의자는 아니지 않나.
"절대 아니죠. 저는 사람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면서 늙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저 역시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싶고요. 하지만 결혼은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남자보는 눈도 높지 않아요. 대시하는 남자가 없었을 뿐이죠.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지만 혼자 살아서 그런지 음식도 잘해요. 친구들한테 음식을 해줄 때 마다 맛있다고 칭찬해 주거든요.(웃음)."
-나이 들면서 자기 얼굴이 어떻게 변해간다고 생각하나.
"어느 날 갑자기 지난 사진들을 보면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여요. 예뻐지기 보다는 근사하게 나이 먹고 싶어요."
-정말 성형을 한 곳도 안 했나. 거짓말하면 안 된다.
"(자신 있게) 그럼요. 물론 피부 관리나 처치 정도는 하지요."(사람들은 강수연의 3대 매력 포인트로 이마 눈 입술을 꼽는다. 나는 눈을 제일로 친다. 가까이서 들여다본 사람만이 안다.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배우 이전의 '여자 강수연'은 외롭고 허전하다. 그는 배우이기 이전에 생활인이기도 하다. 사업에 크게 실패했던 아버지가 오래 당뇨를 앓고 계시고, 오빠 둘과 여동생이 있다. 그에게는 또 생모와 서모, 두 분의 엄마가 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한때 '소녀 가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식구들의 수발을 드는 일을 한 번도 불평해 본 적이 없다. 임권택 감독은 "대견하고 불쌍한 아이다."고 말했다.
-영화나 TV 출연을 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먹고사나.
"자산이나 은행잔액이 많지는 않지만 생활을 유지할 정도는 돼요."
-벌어놓은 돈이 많나.
"제가 돈벌이하고는 인연이 없나 봐요. 얼마 전 이사해 살고 있는 청담동 빌라도 전세죠."
-스폰서는 없나(강수연은 이 질문의 복합적인 함의를 능히 알아차릴 수 있는 배우다).
"전혀 없어요. 제가 돈을 대줘야 하는 사람만 있지…(이 얘기를 할 때 그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스쳐갔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고등학교 때부터 제가 사실상 가장이었어요."
-그런 가정환경이 결혼에 장애가 됐나.
"아니에요. 단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을 뿐이에요. 지금은 가족이 다들 자기 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는 제 앞가림만 하고 살아요."
다시 '배우 강수연'으로 돌아가자. 지난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모처럼 여러 날을 지내며 새로 발견한 사실이 있다. 김동호 집행위원장이 이 영화제의 '대부(代父)'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스크린 뒤에서 이 영화제의 성공을 위해 하루 수십 군데 얼굴을 비추고 밤을 새우다시피 파티장과 술집을 순회하는 '얼굴마담' 세 사람이 있었다. 임권택 감독과 배우 안성기, 강수연이었다. 오전 4시까지 영화인들과의 술자리를 지키다 오전 7시 화장을 말끔하게 한 얼굴로 부산영화제를 참관하기 위해 내려온 국회의원들과의 조찬장에 나타 난 강수연을 보고 '진정한 영화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영화 담당을 했던 기자는 이들의 노고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 택배로 배 한 상자씩을 보냈다. 왠지 그래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강수연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답을 안 주는 짝사랑 같은 것?"
-냉정히 말해 '월드스타'와는 거리가 있다. 당신의 영화적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1980년대 중후반만 해도 세계 영화계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인지도와 위상이 형편없이 낮았어요. 지금은 저변이 많이 넓어졌고, 좋은 배우들도 많이 나오고 있으니 '월드스타'가 나올 여건이 됐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저 기력이 있는 한 배우를 하고 싶어요. 75세가 됐을 때 '집으로'의 할머니 같은 역할을 하면 정말 좋겠어요."
'경마장 가는 길'의 주연을 맡았던 그녀와의 첫 인터뷰 자리에서 나는 "세상에 이렇게 당당하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나" 하는 생각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20대 강수연은 '너무 예뻤다'. 그녀는 한국 영화계에서 너무 빨리, 너무 국제적인 스타가 돼 개인적으로는 피해를 봤다. 그렇더라도 한국 영화계에 강수연 같은 배우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한국 영화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빚졌다.
오명철전문기자 oscar@donga.com
▼ 강수연이 말하는 '여배우+남배우들' ▼
*전도연=연기 잘하고 매사 열심이죠. 욕심도 많아요. 일도 살림도 다 완벽주의자예요.
*이영애=왜 그렇게 갑자기 결혼했는지 모르겠어요. 저한테 연락도 없이…. 남자분이 무슨 매력이 있겠죠. 행복해야 할텐데….
*김혜수=너무 매력 있는 배우죠. 최근 열애 중이라는데 누가 낫다 밑진다 하지 말고 진심으로 축복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미숙=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화끈 화통한 언니죠. 제게 "연애는 해도 애는 낳지 말라"고 하셨어요.
*고현정=연기가 무르익었어요. 앞으로가 정말 궁금하고 기대되는 배우예요.
*고소영=너무 예쁘게 생겨서 손해를 보죠. 열애 소식에 정말 깜짝 놀랐어요. 동물병원에서 몇 번 만났는데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거든요.
*안성기=정말 모범적인 선배죠. 스캔들 한 번 일으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설경구=매력 있죠. 연기 잘하고. 남들은 윤아가 아깝다고 하는데 나는 시집 잘 갔다고 생각해요.
*장동건=너무 잘생겼고, 그것이 그 배우의 가장 큰 문제죠. 잘생긴 것만 보이지 연기가 보이지 않으니까.
*이병헌=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을 선천적으로 타고났죠. 그래서 본인이 힘들 거예요.
*하정우=개발 안 된 매력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기대를 갖게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