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병균 장기적인 상호적응
병균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생명을 유지하려 하지만 인간의 몸은 거기에 대항하는 면역체계를 갖췄다. 양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한다. 사실 병균 쪽에서 생각해 보면 인간의 면역체계를 뚫고 들어가서 번식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강력하게 병을 일으켜서 숙주인 인간 집단 전체가 몰살되면 그들도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문제는 어떤 계기에서든 한 지역의 병균이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전해질 때 일어난다. 면역체계와 치료책이 준비되지 않은 곳에 느닷없이 새로운 병균이 들이닥치면 엄청난 피해를 주는 전염병이 발생한다. 인구의 대다수가 병균에 적응하여 면역체계를 갖추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때까지 수많은 사람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은 역사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구대륙의 병균이 아메리카에 유입된 일이다. 유럽인 선원은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천연두 홍역 장티푸스 성홍열 디프테리아 등의 병균을 갖고 갔다. 1만 년 이상 거의 완벽하게 고립되어 살아온 터라 이런 병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던 인디언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특히 천연두가 가장 큰 피해를 주어서, 16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 병으로 죽은 사람만 2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14세기의 페스트, 19세기의 콜레라, 20세기 초의 스페인독감도 갑자기 낯선 병균이 전파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차분히 대비하면 피해 최소화
그러므로 전염병의 유행은 그 자체가 인류 역사에서 늘 일어나는 상수(常數)와도 같다. 올해 세계적으로 유행한 신종 인플루엔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전염병이 지나가면 언제든 새로운 전염병이 들이닥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잘 인지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느 역사가는 선진국이란 인프라(하부구조)가 튼튼한 국가라고 말한 바 있다. 자연의 재앙에 대해 사회가 철저히 대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강력한 태풍이 들이닥쳤을 때 동남아시아의 일부 국가에서는 수많은 이재민이 생겨나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대개 몇 명의 희생자만 생긴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