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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셨더라도 심신미약(사물 변별력, 의사결정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에 이르지 않았다면 형량 감경사유로 고려해서는 안 된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21일 오후 제22차 정기회의를 마친 뒤 아동 성 범죄자에 대한 기존 양형기준을 보완했다며 발표한 내용이다.
얼핏 보면 술을 마셨다는 것만으로는 형량을 깎아줄 수 없도록 해 아동 성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발표에는 정작 핵심적인 내용이 빠져 있다. 피고인이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할 때에 이를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한 명확한 판단근거가 마련되지 않으면 범죄자가 술에 취했다고 주장할 경우 관대한 처벌을 내려온 법원의 기존 양형관행을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알맹이 없는 결론이 나온 것은 위원회 내부의 첨예한 의견 대립 때문이었다. 검찰 측은 양형기준 내에 전문가의 감정 또는 객관적 증거에 의해 심신미약 상태가 입증된 경우에만 형을 감경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같은 이유를 판결문에 구체적으로 적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 측이 심신미약 여부 판단은 법관의 권한인 ‘사실 인정’의 문제이므로 양형위가 권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맞서면서 검찰 측 주장은 채택되지 않았다. 양형위는 확정된 범죄사실에 어떤 형을 적용할 것인지 기준을 만드는 곳이지, 사실관계 판단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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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같은 상황의 발단은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을 감경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은 현행 형사소송법 때문이며, 이를 바로잡는 것은 국회의 몫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영이 사건에 대해 쏟아진 국민적 비판에 대한 근본적 성찰 없이 양형위가 ‘눈 가리고 아웅’식 대책을 내놓은 것은 너무 안일한 것 같다.
전성철 사회부 daw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