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에 은행 줄래?… 마스크처벌법…
민주 ‘특권층 vs 서민’ 편가르기로 감성 자극
한나라 ‘민생법안 연내처리’ 당위성만 외쳐
전문가들 “정치적 이름 붙이기 야당이 앞서”
김형오 국회의장이 4일 쟁점 법안의 ‘직권상정 불가’ 방침을 밝힌 직후, 한나라당 내에서는 김 의장에 대한 성토와 함께 “우리는 홍보전에서 완패했다”는 자책이 쏟아졌다. 홍보전을 소홀히 한 탓에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날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에서 농성 중이던 민주당 당직자들은 ‘MB(이명박 대통령) 악법 결사반대’ 구호를 거듭 외치며 승리를 자축했다. 이 구호는 불법적인 점거 농성을 시작할 때 내건 대형 플래카드에도 등장한다.
결국 홍보전이 여야의 희비를 가른 셈이다. 그렇다면 ‘정치 선동’과 ‘정책 홍보’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구호의 정치학=민주당은 지난달 ‘법안 전쟁’이 시작되자 윤호중 전략기획위원장을 중심으로 매일 전략홍보회의를 열었다.
사태 초기에 내건 구호는 ‘MB 악법 철폐’. 하지만 여론은 무덤덤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이 제시한 ‘민생법안 연내 처리’에 비해 호소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았다.
민주당은 다시 ‘재벌에 방송 줄래?’ ‘재벌에 은행 줄래?’를 들고 나왔다. 여야의 정치적 대치 상황을 단숨에 ‘특권층 대 서민’ 구도로 바꿔놓은 것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방송법과 은행법 개정 배경을 논리적으로 전달하려 애썼다.
“방송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자본을 투입해야 한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이 재현되지 않으려면 연기금의 은행 참여를 허용해야 한다” 등 복잡한 내용을 쏟아냈다.
민주당의 ‘감성 공세’는 계속됐다. MBC 등 방송사 파업이 시작되자 동아 조선 중앙 등 메이저 신문에 대한 ‘특혜입법’이라는 주장을 시작했다.
방송을 민주당 편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방송 대 신문’ ‘보수 대 진보’라는 이념 구도로 전선을 넓혔다. 방송사 카메라가 이 구호에 앵글을 맞추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또 각종 쟁점법안을 마스크 처벌법(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재벌은행법(은행법) 등으로 이름 붙였다.
민주당이 이처럼 기민하게 대응하는 동안 한나라당은 시종일관 ‘민생법안 연내 처리’만 외치고 있었다.
▽카피라이터에게 물어보니=여야의 홍보 전략을 마케팅 기법에 대입해 보면 승패를 가른 이유가 더 분명해진다.
광고 카피는 소비자의 인식을 바꿔 상품에 대한 특정 태도를 형성하게 한 뒤 구매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목적 지향적인 언어다.
이 기준에 맞춰 보면 한나라당의 ‘민생법안’ 구호는 의미 전달은 되지만 구매행동(여론의 지지)으로 이어지기에는 두루뭉술하다.
한 대형 광고기획사의 카피라이터는 “정치 소비자에게 ‘아! 그런 거였어?’라는 느낌을 주고 ‘정치상품’을 구입하게 해야 하는데 ‘민생법안’ 구호는 단지 ‘이런 게 있다’는 식”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또 “민주당은 재벌을 들고 나와 기존 고객의 충성도를 자극했다”며 “판매자의 브랜드 콘셉트에 일치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줄 만하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카피라이터는 “상품을 홍보할 때 소비에 따른 이익이 누구에게 귀속될지를 확실히 해야 하는데 ‘재벌에 방송 줄래?’는 이면의 진실과 상관없이 이 점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개별 법안에 대한 네이밍(이름 붙이기)에서도 민주당이 확실한 우위를 보였다고 평가받는다.
한 대기업 계열 광고회사 관계자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은 일반인의 언어가 아닌데 민주당은 이를 ‘마스크법’이라는 소비자 언어로 번역했다”며 “이들 네이밍이 다시 ‘MB악법’이라는 최상위 전략으로 수렴되는 구조를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