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문학예술]그들의 죽음, 나를 손가락질한다

입력 | 2008-11-29 03:04:00


◇오래된 일기/이승우 지음/280쪽·9800원·창비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내 잘못이 아니라 하기도 힘든 불행. 개연성 없는 사건들이지만 사건의 연결고리에서 결코 자유롭기 힘든 죄책감. 이승우 작가의 신작 소설집 ‘오래된 일기’에서 작가는 삶의 기저에 자리 잡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의식과 그것과 치열하게 대면하는 행위로서의 소설쓰기(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삶의 관계에서 얽힌 부채감과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가족, 연인, 친척, 이웃과의 관계에서 올 수도 있으며 때로는 살면서 마주치거나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주변인들로부터 올 수도 있다.

표제작 ‘오래된 일기’는 뜻밖에 맞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 소설가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지갑 속에서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훔쳤던 날, 소년은 들통날까 걱정되는 마음에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날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1000원의 행방을 따지지도 않고 따질 수도 없는 곳으로’ 돌아가셨다. 이런 마음의 짐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믿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그를 키워준 큰아버지의 아들 규에게 전이된다. 규는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대학 진학, 소설가의 꿈을 모두 손쉽게 이룬 주인공은 결국 암으로 죽게 된 규의 존재가 짓누르는 죄책감이 이제껏 글을 쓰게 한 동력이었음을 깨닫는다.

떨쳐지지 않는 죄의식의 모습은 소설마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정남진행’은 정남진에 함께 가자고 연락해온 오래전 여자친구의 부탁을 거절한 며칠 뒤 그녀의 부고를 듣게 되는 뜻밖의 사건으로 시작된다. 부탁을 거절한 것이 죽음의 원인은 결코 아님에도 주인공은 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실종 사례’에서는 돈을 빌려간 뒤 사업 실패로 잠적한 이웃이 지하철 방화사건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들을 끝까지 찾지 않았던 것은 담보 격으로 받았던 강원도 땅에 도로가 뚫리며 몇 배나 많은 차익을 남겼기 때문이란 사실에서 주인공은 번민을 느낀다.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 역시 세상의 폭력성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힌 상규를 돌보면서 가족들이 겪게 되는 갈등과 부담감, 죄의식의 이면을 좇아간다.

‘방’ ‘전기수 이야기’ 등에서처럼 인생의 우발적 사건들의 직간접적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부채의식을 글쓰기를 통해 마주하는 작가로서의 자의식, 소설론이 엿보이는 작품도 수록됐다.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작가 특유의 사유는 여전하지만 이해를 구하는 일도, 예고를 하는 일도 없이 갑작스레 펼쳐지는 삶의 불가해성을 현실에 밀접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좀 더 친근하게 풀어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