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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7년 남아공 인권운동가 비코 고문사

입력 | 2008-09-12 02:44:00


스티브 비코는 1977년 8월 도로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떠오르는 흑인 인권운동가로 “검은 것이 아름답다” “당신은 지금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한 인간으로 자신을 바라보라”고 흑인에게 호소하곤 했다.

1960년대 초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와 로버트 소부퀘가 수감된 뒤 남아공 흑인 운동은 구심점을 잃은 채 비틀댔다. 이때 비코가 흑인의 자긍심과 존엄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흑인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나탈대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그는 남아프리카학생동맹(NUSAS)에서 활동하다가 이 단체가 흑인 학생의 요구를 대변해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탈퇴했다. 1968년 남아프리카 전흑인학생연합(SASO)을 설립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으며 1972년 퇴학당한 뒤 전업 활동가로 나섰다.

비코는 여러 조직과 운동을 이끌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남아공 백인정부의 탄압을 받는다. 보안관찰 처분으로 집필과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고 거주가 제한됐으며 여러 혐의로 수차례 체포와 구금을 겪었다.

1977년 ‘최후의 체포’를 당한 비코는 보안경찰 건물인 샌럼빌딩 619호로 끌려갔다. 쇠창살에 묶인 채 22시간이 넘도록 고문과 구타를 당한 그는 심각한 뇌손상을 입고 만다. 경찰은 의식이 없는 비코를 알몸 그대로 랜드로버 뒷좌석에 방치한 채 1500km나 떨어진 병원으로 싣고 갔다. 그리고 이튿날인 9월 12일, 서른 살 짧은 생이 끝났다.

경찰은 사망 원인이 7일간의 단식으로 인한 쇼크라고 발표했지만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젊고 유망한 흑인 지도자의 죽음은 남아공에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잔혹한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에 세계 각국의 비난이 쏟아졌다. 비코의 장례식에는 1만5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몰려들었는데 미국과 서유럽 지역의 대사와 외교관도 자리를 함께했다.

고인의 절친한 친구이자 남아공 신문 ‘데일리 디스패치’의 편집장이던 도널드 우즈는 시신 공시소에서 촬영한 비코의 사진을 공개했다. 머리 부분의 심한 상처는 의문사라는 덮개를 들추는 명백한 증거였다.

남아공 정부는 우즈에게 비코와 같은 보안관찰 처분으로 대응했고 공개 활동을 금지시켰다. 우즈는 삼엄한 감시 속에 국외 탈출을 감행했고 영국 망명 생활 동안 비코의 삶과 투쟁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차별과 억압에 당당했던 ‘검은 거인’ 비코. “열등감에서 벗어나라”는 그의 강인한 목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