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조커로 평가받는 히스 레저. 삶의 궤적과 비슷한 역할을 온몸으로 살아내다가 마지막 불꽃을 빛내고 사라졌다. 사진 제공 올댓시네마
북미 흥행 4주 연속 1위의 배트맨 시리즈 ‘다크 나이트’가 한국에서도 개봉 첫 주말 1위에 올랐다.
11일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이 작품은 8∼10일 전국 67만7000명의 관객을 모았다.
지난 주말까지 미국 박스오피스 4억4000만 달러로 ‘타이타닉’(1997년)의 6억 달러 기록을 넘보고 있는 상황.
다크 나이트 폭풍의 핵은 ‘조커’ 역의 히스 레저(본명 히스클리프 앤드루 레저)다. 그는 소설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처럼 바람 같은 삶을 살다 올해 1월 29세로 요절했다.
사후(死後) 다크 나이트가 개봉된 뒤 그를 2009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레저의 연기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레저의 조커에 대해 ‘죽기 전 딱 한번 들려주는 백조의 노래’라는 찬사를 보냈다. 워싱턴포스트는 “다크 나이트는 레저를 빼면 거의 모든 에너지와 역동감을 잃는다”고 평했다.
하지만 그는 최고의 조커라는 마지막 모습만으로 기억하기에 아쉬운 배우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원작 소설을 쓴 애니 프로는 레저에 대해 “내가 만든 캐릭터를 나보다 깊이 이해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조커의 하얀 분장을 지운, 그의 깊은 눈과 매력적인 입 꼬리를 다른 작품에서도 확인하길 권한다.
○ 발아(發芽)…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년)
풋풋했던 갓 스물 레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하이틴 물. 무료한 주말 오후에 과자 한 봉지, 만화책 한 권 끼고 누워서 한눈팔며 볼만하다. 미국 중산층 고교생들의 황당무계한 연애 이야기를 그렸다. 하지만 레저의 푸른 눈과 미소에만 집중해도 괜찮은 심심풀이다.
토라진 연인 캣(줄리아 스타일스)을 달래기 위해 레저가 운동장 스탠드에 마이크 하나 들고 서서 무반주로 ‘캔트 테이크 마이 아이스 오프 유’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는 엽기적인 바보짓도 폼 나게 저지르는 꽃미남이었다.
○ 개화(開花)…기사 윌리엄(2001년)
‘패트리어트-늪 속의 여우’(2000년)나 ‘몬스터 볼’(2001년)에서 영화 중반 죽어버리는 조연에 머물렀던 레저가 단독 주연으로 나선 영화.
록 밴드 ‘퀸’의 ‘위 윌 록 유’를 내세워 고리타분한 중세 기사 이야기를 신세대 로맨스로 포장했다. 팡파르 나팔로 전자기타 소리를 내는 척하고, 중세 무도회에서 디스코 음악을 뻔뻔하게 틀어댔지만 신선한 감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주인공 윌리엄의 동료 시인 초서로 등장했던 폴 베타니(37)도 다크 나이트 조커 역 물망에 올랐었다.
○ 만개(滿開)…브로크백 마운틴(2005년)
청춘스타와 촉망받는 연기파 사이를 애매하게 맴돌던 레저의 가능성을 확인해 준 영화. 리안 감독은 “레저는 촬영 기간 내내 주인공 에니스 델마로 생활했다”고 평가했다.
레저는 이 작품에서 부인 알마 역으로 출연한 한 살 연하 미셸 윌리엄스와 결혼해 딸 마틸다를 얻었다. 이 영화로 2006년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상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에게 돌아갔다.
○ 낙화(洛花)…아임 낫 데어(2007년)
찬란한 빛은 짧았다.
레저는 윌리엄스와 2007년 9월 이혼했다. 체계적인 연기 수업을 받지 못해 늘 자신의 역할을 치열하게 살아냈던 이 배우는 가수 밥 딜런을 주제로 한 전기영화 ‘아임 낫 데어’에서도 ‘이혼 무렵의 딜런’ 부분을 연기했다.
레저는 감정을 마음속에 삭혀내 표정이 아닌 몸으로 지그시 뽑아내는 배우였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연인 잭(제이크 질렌홀)을 덤덤히 떠나보낸 후 골목에 숨어 소리 죽여 흐느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미치광이 조커 역할은 그에게 너무 위험한 숙제였는지도 모른다.
레저의 사인은 진통제 수면제 등 6개 약물의 우발적 과용으로 밝혀졌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마약 중독자 역을 맡았던 ‘캔디’(2006년)가 4월 뒤늦게 한국에서 개봉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