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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知논술/명화, 생각의 캔버스]메디치, 르네상스를 꽃피운 ‘태양’

입력 | 2008-07-14 02:56:00


《미술관에 가면 빼어난 예술작품을 많이 볼 수 있어요. 또 교양미 넘치는 관람객들이 삼삼오오 그림을 감상하는 광경을 옆에서 구경하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재미랍니다. 그런데 미술관에 걸려 있는 작품이 처음부터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작품마다 만들어지기까지 나름대로 사연을 품고 있고, 또 여러 소장가의 손을 거쳐서 마침내 미술관에 입성하는 데에도 오만가지 곡절을 거치게 마련이지요. 서양미술의 경우 원래는 대부분 궁정의 회랑, 귀족의 저택, 도시의 부유한 시민의 거실, 작가의 작업실, 외딴 수도원의 지하 회랑 같은 곳에 걸려 있던 작품이 열성적인 수집가나 기증자의 끈질기고 오랜 노력을 거쳐서 미술관의 수장고를 채우게 되었지요.》

【?】 권력은 예술가의 재능을 키우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요. 수집가와 후원자의 진정한 역할은 어떤 것일까요.

또 제국주의 시대 서구열강들의 침략 수탈 전쟁과 19세기에 이르러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공공 미술관 건립운동이 없었더라면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 박물관은 오늘날의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기 힘들었을 테지요.

미술품 수집 과정이 어찌되었든 간에 예술을 사랑하는 애호가로서는 근사한 작품을 한곳에서 간편하고 손쉽게 감상할 수 있으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작품을 원래 있던 장소에서 떼어내서 태생이 전혀 다른 작품과 함께 다닥다닥 붙여 놓는 바람에 작품이 가지고 있던 역사성과 생명력을 상실했다고 비판하면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예술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요.

미술품 수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훌륭한 예술가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또 이들이 충분히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예술의 후원자, 장려자, 주문자로서 수집가는 마치 씨앗을 뿌리고 정성껏 돌보아서 결실을 거두는 정원사의 역할과 비슷하지요. 화가, 조각가, 건축가, 공예가들을 양성하고 배출하는 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에서 작가들이 작품을 구상하고 완성하기까지 들어가는 재료와 작업비용을 대는 것은 수집가들의 주된 임무였어요.

그렇다면 예술가와 수집가는 어떤 관계일까요. 예술과 권력은 어떤 상관이 있는 걸까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정체와 고대 이집트의 전제주의 정체 가운데 어떤 것이 예술의 진작에 더 도움이 되었을까요. 중세의 종교 미술과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미술은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을까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페르시아의 자수 양탄자는 어느 것이 더 높은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이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 앞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해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유명한 예술 수집가이자 대표적인 후원자였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이야기지요.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요람이자 ‘도시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수많은 천재 예술가가 출몰해 문화의 꽃을 피웠던 이탈리아의 도시랍니다. 오늘날의 피렌체는 메디치의 흔적으로 가득합니다. 메디치는 피렌체의 융성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에 문화의 품격을 부여했어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고 든든한 뒷바라지를 한다는 소문에 재능 있는 인문학자와 예술가가 피렌체로 앞 다투어 몰려들었고, 메디치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지요. 피렌체의 명성이 높아지자 예술을 탐내는 다른 도시의 군주들이 메디치에게 자문했고, 피렌체는 예술가들을 다른 도시로 파견하여 새로운 예술의 씨앗을 퍼뜨렸어요.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밀라노의 스포르차에게 보낸 것도 피렌체의 메디치였다고 해요.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는 근대에서 처음으로 미술 후원의 역사를 열었던 인물이지요. 코시모 이전의 피렌체는 200여 개의 수비성탑이 솟아 있는 여느 중세도시와 같았어요. 그러나 코시모와 그의 아들 피에로, 그리고 손자 로렌초로 이어지는 메디치가 주도한 예술진흥정책에 힘입어 피렌체는 불과 60년 사이에 유럽 최고의 문화도시로 탈바꿈하지요.

코시모가 꿈꾸었던 것은 최고의 문화도시였어요. 도시의 진정한 경쟁력이 학문과 예술의 바탕에서 나온다고 확신했던 코시모는 비잔틴 철학자 플레톤의 조언을 받아 피렌체 인근 카레지의 메디치 별장에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를 창설하고 고전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학장으로 임명했어요. 근대 최초의 인문학 요람으로 불리는 피렌체 아카데미아는 걸출한 사상가와 철학자들은 길러냈어요. 플레톤의 제자 베사리온 추기경이 비잔틴에서 가지고 온 고문헌들은 코시모의 소장품에 흡수되어 유럽 최초의 공공도서관으로 일컫는 피렌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모체가 되지요.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 아무도 해독하는 사람이 없었던 그리스어를 읽기 위해서 그리스어 교육에 투자한 것도 코시모였어요. 미켈란젤로와 보티첼리 같은 뛰어난 예술가들이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철학에 깊이 매료된 것은 전적으로 메디치의 문화 정책 덕분이었어요. 위대한 한 명의 후원자 덕분에 학문과 예술이 만나게 된 것이지요.

코시모가 건립한 메디치 리카르디 저택은 안뜰과 건물 내부에 고대와 르네상스의 걸작이 망라되어 있는 예술의 빛나는 보고(寶庫)였어요. 저택의 회랑은 전형적인 고대 로마의 주거건축 양식을 본떠서 네모난 안뜰로 조성했는데, 공들여 수집한 조형물과 석조물들이 햇살을 받고 자태를 뽐냈다고 해요. 예술 애호가와 병아리 예술가들은 메디치 저택의 안뜰을 거닐면서 예술의 향기에 흠뻑 취하곤 했어요. 메디치는 예술가들이 나이를 먹고 더는 일을 할 수 없을 때에도 연금을 지급했어요. 피렌체의 예술가들은 아무 걱정 없이 작품에 전념할 수 있었지요.

피렌체 시의회에서는 단순히 한 시민의 신분에 불과했던 코시모에게 ‘국부(pater patriae)’의 칭호를 선사했어요. ‘나라의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피렌체 시에 대한 코시모의 공헌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지요. ‘국부’는 고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 유일하게 메디치의 코시모에게 주어진 명예스러운 칭호였다고 해요.

노성두 서양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