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뉴요커 두 명과 자리를 함께했다.
화제가 ‘뉴요커의 유별난 자존심’에 이르자 한 뉴요커는 “누가 미국인이냐고 물으면 나는 꼭 ‘뉴요커’라고 대답한다”고 말했다. 다른 뉴요커는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뉴욕 경계를 지나면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미국인’이라고 농담을 한다”고 거들었다.
이처럼 콧대 높은 뉴요커들이 매일 빼놓지 않고 손에 쥐는 것이 뉴욕타임스다. 특히 문화 기사는 이 신문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꼭 찾아 읽을 정도로 수준이 높다.
뉴욕타임스에는 요즘 한국 문화 기사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뉴욕한국문화원은 지난해 이 신문이 보도한 한국 문화 관련 기사가 105건이라고 밝혔다. 한 주에 두 건꼴이다.
뉴욕에는 한국 영화 골수팬도 의외로 많다. 얼마 전에 만난 월가의 한 샐러리맨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데뷔작부터 최근작까지 모두 꿰뚫고 있는 한국 영화 전문가였다. 그는 김 감독 작품 대부분을 DVD로 소장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뉴욕 현대미술관도 23일부터 다음 달 8일까지 김 감독이 제작한 작품 14편 모두를 상영하는 회고전을 개최한다.
한국 음식도 각국의 최고 음식들이 경쟁하는 뉴욕에서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다. 지난달 찾은 맨해튼 50번가의 한국 식당은 32번가 코리아타운의 전형적인 한식당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손님 대부분이 미국인이었다. 폴란드 등 동유럽권 출신 웨이터들이 뉴요커들에게 다양한 한국 음식을 서빙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춘 메뉴 개발 및 다양한 디저트로 뉴요커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다.
다른 한식당 한 곳도 최근 뉴욕의 간판 레스토랑 가이드북인 ‘자갓 레스토랑 서베이’에서 채식식당 부문 1위를 차지했다.
그뿐만 아니다. 요즘 뉴욕에선 젊은 한국인들이 새로 문을 연 레스토랑이 인기를 끌면서 뉴욕타임스에도 자주 소개되고 있다. 대부분 미국 유명 요리학교 등을 다닌 실력파다. 이제 음식에 대한 관심이 많은 뉴요커라면 불고기, 갈비, 잡채 등은 알고 있을 정도가 됐다.
이처럼 한국 음식이 부쩍 인기를 끄는 데는 최근 불고 있는 건강식 열풍도 한몫을 한다. 미국요리학교(CIA)의 존 니호프 교수도 최근 존스홉킨스대에서 열린 한류 세미나에 참석해 “요즘 미국인들이 음식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중요한 요소가 ‘건강에 좋은 음식’인데, 한국 음식은 이런 추세를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렇지만 뉴욕에서 한류는 ‘현재진행형’이다. 아직까지는 일부의 관심사일 뿐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침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화제가 됐던 가수 ‘비’의 뉴욕 공연도 청중의 대부분이 아시아계였다. 한국 영화들도 비평가들이나 소수의 영화 팬 사이에선 인기가 높지만 일반 미국인들에게는 낯선 영화로 남아 있다. 화제 속에 개봉됐던 ‘괴물’이나 ‘디워’도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국 음식도 아직까지는 일본, 중국 음식이나 태국 음식에 비해 인지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류가 뉴욕에서 이 정도까지 교두보를 확보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인들을 사로잡은 초밥 등 일본 문화도 처음에는 소수 팬의 유별난 취미로 여겨졌다.
아직까지는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있는 한류가 미국 문화의 중심인 뉴욕에서 만개해 언젠가는 전체 미국인을 사로잡게 되기를 기대한다.
공종식 뉴욕 특파원 k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