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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눈/후지와라 기이치]역사화해, 日이 손내미는게 순리

입력 | 2008-04-04 03:00:00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일본 한국 대만에서 새로운 정권이 탄생했다. 모두 실용주의적 자세가 특징이다.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이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때문에 우려를 사던 이전 정권과는 크게 다르다. 세 실용주의 정권에 의해 아시아의 지역 질서는 어떻게 바뀔까.

일각에서는 ‘국내용 내셔널리즘’을 조장하던 정권들이 퇴진했으니 동아시아 국가 간의 정책 협조가 크게 진전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나온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총리는 전임자들과 달리 취임 전부터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도 역사문제보다는 대일 관계 회복을 중시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으므로 한일 관계의 호전도 기대할 수 있다.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 당선자가 중국과의 경제 관계 강화를 추진하고 있어 중국-대만 간 긴장도 줄었다.

반대로 비관론도 있다. 총리나 대통령이 이념에서 후퇴했다고 해서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회나 야당은 이념을 이용해 정부를 공격할 수 있다. 대만 의회는 마 당선자의 국민당이 압도적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아직 불안정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후쿠다 총리나 이 대통령은 정권 출범 직후부터 격한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정권이 바뀐 것만으로 지역협력의 확대를 점치기에는 이르고, 중-일 간 힘의 균형이 크게 바뀌려는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안정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은 것이다.

어느 쪽이 맞을까. 결과는 각국 정부가 취하는 정책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역사문제가 아닐까 한다. 지금 한국이나 중국에서 한반도 식민지화나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행동을 비난하는 식의 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다. 일본에서는 ‘이럴 때 일본이 역사문제를 언급하면 미래를 가로막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문제에 관한 논쟁이 불붙는 계기는 거의 늘 일본이 제공했다. 일본에서의 사건이나 누군가의 발언이 해외로 크게 전달돼 과거를 상기시켜 반발이 확산되는 구도였다. 나는 역사문제에 대해 중국이나 한국에서 나오는 발언 중에는 편견이 섞인 것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상호불신을 퍼뜨리고 악순환을 재연해 온 책임이 일본 측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악순환을 뒤집으려면 뭘 해야 할까. 우선 신뢰를 쌓기 위한 걸음을 일본 측이 내딛는 방법이 있다. 역사문제에 대해 조용한 지금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기회다.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메시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다시 한 번 식민지 지배와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확인하고, 전후(戰後)에는 군대에 의존하지 않는 외교와 민주주의를 지켜온 역사도 내세우는 것이다. 역사문제에 대한 신뢰의 선순환이 시작되도록 일본이 선수를 치자는 얘기다.

오늘날 일본에서 이 같은 주장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나 중-일전쟁이 옳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보수세력의 공격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수세력의 목소리가 커지면 그 부분만 한국이나 중국에 보도돼 다시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국민 여론 중 소수파에 불과한 보수세력 때문에 일본 정부뿐 아니라 전체 일본인이 신용을 잃는 게 정당한 일일까. 전쟁을 미화함으로써 전후 일본이 걸어온 길을 부정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역사문제를 둘러싼 정책 결정은 동아시아의 안정뿐만 아니라 일본의 국내 정치를 좌우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후지와라 기이치 도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