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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임성호]정치, 책략은 짧고 원칙은 길다

입력 | 2008-03-13 03:03:00


책략적 사고의 한계가 날로 크게 느껴진다. 열심히 머리를 짜내 재고 계산해도 결과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역효과가 나기 십상이다. 일상생활 곳곳에서 그렇겠지만 특히 정치와 관련해 책략의 한계가 두드러진다. 이는 정치를 책략과 잘못 동일시하는 경향 속에서 아이러니한 일이다. 요즘 한창 가열되고 있는 미국 대선 예비선거와 한국의 여러 정치 상황을 볼 때 드는 생각이다.

올해 미국 대선 예비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후보가 치열한 접전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이면에 플로리다 주와 미시간 주는 최대 패배자로 전락했다. 두 주는 민주당 당규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예비선거를 1월로 앞당겨 치른 탓에 경선 결과를 인정받지 못하는 징계를 받았다. 민주당의 최종 승자를 결정하는 전당대회에서 플로리다와 미시간 주는 한 명의 대의원도 표를 던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심한 치명타를 입게 된 것은 두 주가 자기 꾀에 스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쓴 책략이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켰다.

美예비선거 2개州 꾀부리다 손해

그동안은 예비선거를 먼저 치르는 주일수록 여러 가지 정치혜택을 본다는 철칙이 있었다. 초반 승기를 잡기 위해 대선후보마다 이들 주에 돈, 시간, 정책 약속을 쏟아 부었다. 이들 주는 또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정치적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아이오와와 뉴햄프셔 주는 인구가 적지만 경선 일정상 1, 2번 주자로서 엄청난 프리미엄을 누려 왔다. 반면 승패가 이미 가려진 중반 이후 느지막이 경선을 치르는 주들은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주는 가장 큰 주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예비선거는 늦은 일정 때문에 의미를 잃은 채 맥 빠진 상태로 열리곤 했다.

이러한 과거 경험을 보며 플로리다와 미시간 주가 얕은꾀를 썼다. 자기네도 예비선거 일정을 앞당기면 아이오와나 뉴햄프셔 주처럼 득을 볼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러나 웬걸, 두 주의 책략적 행동은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징계로 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선의 예상치 못한 전개로 인해 큰 조롱거리가 되었다. 올해 민주당 예비선거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초반에 승부가 나지 않고 끝까지 숨 막히는 접전이 이어지게 돼 선거를 늦게 치르는 주들이 더 큰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원래의 경선 일정을 준수한 오하이오 텍사스 펜실베이니아 주 등이 위상을 높였고 최종 주자인 몬태나 사우스다코타 주와 심지어 정식 주도 아니지만 대의원 선출 권한을 가진 푸에르토리코가 관심을 끌고 있다. 플로리다와 미시간 주로서는 가만히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괜한 책략으로 원칙도 깨고 실리에서도 큰 손해를 본 것이다.

정치의 예측불가성이 날로 증가하는 오늘의 상황은 책략의 유용성을 낮추고 있다. 사회구조가 워낙 다양하게 파편화하고 복잡하게 얽히며 사람들의 이익과 생각도 도저히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 아무리 뛰어난 머리로 정치 책략을 세워도 결과는 예상을 벗어난다.

미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작년 17대 대선에서 온갖 책략이 난무했지만 의도했던 결과를 낸 것은 거의 없다. 요즘 주요 정당이 4월 총선을 위한 공천으로 머리를 짜내고 있지만 그들의 ‘전략적’ 판단이 국민의 공감을 얻기보다는 많은 무리와 부작용을 내며 국민의 불신감만 팽배해지고 있다. 특히 공천 결정을 가능한 한 늦추는 책략은 당의 분열을 막기는커녕 막판 자살골로 작용할지 모른다. 삼성 비리 폭로도 너무 책략적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그 폭로 주체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는 역효과가 나고 있다.

한국 총선, 전략 앞세우지 말길

책략의 필요성을 부인할 수 없지만 요즘 같은 정치 상황에서 얕은꾀를 부리지 않고 원칙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실리를 얻는 길일 수 있다. 수많은 주장과 생각이 서로 부닥치는 가운데 무언가를 창출해야 하는 정치는 인간의 책략적 사고로 공작품처럼 뚝딱 만들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돌발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깊은 원칙을 강조할 때 정치는 순간 반짝하는 멋은 없을지라도 유기체처럼 서서히 만들어지고 변화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임성호 경희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