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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제6장 日中전쟁(上)

입력 | 2008-01-07 13:47:00

일중 전쟁의 계기가 된 사건이 부근에서 일어난 루거우차오(盧溝橋)=베이징(北京) 교외에서, 후쿠다(福田)가 촬영


중국과 세계의 변화를 오인했다

중국 동북부에 ‘만주국’을 건설한 일본은 마침내 중국과의 전면 충돌을 시작한다.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은 손을 잡고 대항했다. 일본의 침략 전쟁은 중국에 참화를 불러왔지만, 즉흥적인 진군은 일본 자신의 파국을 초래하는 길이기도 했다. 전선은 이윽고 중국을 넘어 확대되어 갔다.

아주 젊은 부관장이란 생각이 들어 나이를 물었더니 37세라고 했다. 베이징(北京) 교외의 중국 인민 항일 전쟁 기념관에서 만난 리종위웬(李宗遠) 씨다. 관장도 올해 47세로, 나와 동갑이라는 사실에 조금은 놀랐다. 인민 항일 전쟁, 일본에서는 일중 전쟁이라 하는 이 전쟁의 기록과 기억을 계승하고 대외적으로도 설명을 하는 중직에, 지금은 3-40대 사람이 기용되고 있다.

전쟁 종결로부터 62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좀 더 노년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얼마 전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 50대 2명이 최고 지도부에 들어간 것을 떠올리면 과연 여기저기에서 세대 교대가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항일 전쟁은 긴 세월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으며, 세계적으로도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물론 리(李) 씨는 중국의 공식적인 견해도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이쪽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틀에 박힌 대답만은 아니었다.

항일전쟁에 동원된 중국 민중들의 모습을 실증적으로 더듬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은가라고 최근 일본에서의 연구서를 예를 들어 물었더니, 리(李) 씨는 필요성을 인정하며 “중국에서도 그러한 연구가 있는지 어떠한지. 일본에서 책이 나왔다면, 꼭 읽어 보고 싶네요”라고 말했다. 나쁜 것은 일본이라고 일축하지도 않고 빈정대는 말투도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사사가와 유지(笹川裕史) 사이타마대(埼玉大)교수들이 쓴 『후방의 중국 사회』였다. 지금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 했던 일중 전쟁 당시 중국 측의 총동원 체제에 대해서 억지로 군인이 되거나 식량을 징수 당하거나 한 농촌의 실태를 역사 자료를 통해 세밀하게 조사하고 있다. 덧붙이면, 일본의 침략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역사적 사실로서 일중 전쟁의 전체 상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기념관의 전시가 2년 전부터 조금 변했다. 오로지 공산당의 전투로만 그려져 온 전쟁이었지만, 거기에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인솔하는 국민당 정부군의 설명이 조금 추가되었다. 리(李) 씨는 초등학교 시절, 국민당 정부군은 항일 전쟁에 소극적이었다고 배웠다며, “그 말은 옳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국민당 정부군의 역할은 적극적이었다고 평가되어 진다”고 말했다.

세대 교대 진행되는 중국 / 기념관도 새 단장

이러한 미묘한 변화는 난징(南京)에서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둘러싸고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살 기념관”이 아니라, “평화 기념관”이라 개칭하자는 안이 내부에서 제기되었다라고 여러 관계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학살이 있었던 것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일본에서 존재하는 한 당치도 않는 시기상조라며 없었던 일로 되었던 것이다.

새롭게 단장한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사건으로부터 70년이 되는 올 12월에 개관한다. ‘반일’강화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실제로는 ‘반전 평화’의 취지를 더욱 강조하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한다. 난징(南京) 사범 대학에서 만난 장리엔훙(張連紅) 교수는 “서로가 부의 유산을 제대로 응시하여 미래를 향한 평화적인 관계를 쌓아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 때에는 기념관의 명칭도 바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덧붙이면, 난징대학살 연구 센터 주임을 맡고 있는 장(張) 씨도, 작년에 40살이 되었다고 한다.

‘세대교체’는 중국의 도시 그 자체에서도 현저하다. 내년 올림픽 개최를 향해 달리고 있는 베이징(北京)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인구 700만 도시가 된 난징(南京)에서도 가는 곳마다 고층 빌딩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본디, 물과 녹음이 아름다운 고도이지만 시 중심부에서는 분진 때문인지, 길을 걷는데도 마스크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일본 기업들도 잇달아 진출해 난징시(南京市) 세수입의 3할을 외자가 차지한다.

국제도시에서 전투 / ‘일본의 횡포’에 주목

생각해 보면, 정말 무모한 전쟁이었다.

발단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盧溝橋) 부근에서 일어난 일중 양군의 소규모 충돌이었다. 지금은 베이징(北京) 중심부로부터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인민 항일 전쟁 기념관은 다리 부근에 있다. 그 다리 끝에는 베이징(北京) 올림픽의 마스코트 그림을 벽에 장식한 작은 가게가 있어,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는 지금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확실한 것은, 중국에서, 일본군이 야간 연습을 끝냈을 쯤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일본은 1900년 의화단사건(북청 사변)에 열강과 함께 개입한 이래로, ‘지나(支那)주둔군’을 두고 있었다.

애당초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중국 등은 일격에 굴복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근대화로 앞서 있던 일본은 전선을 끊임없이 확대해 결국은 파국을 향해 나아갔다. 통수권을 방패로 한 군부의 독주였다. 그 군내부에서조차 갈라진 의견, 눈앞에 사로잡힌 ‘점과 선’의 진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최대 요인은 중국에서 높았던 내셔널리즘과 국제 사회의 동향을 모두 오인했던 것이다.

청일,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이후, ‘대중국 21개조의 요구’로부터 만주 사변, 그리고 ‘만주국’ 건설등, 일본은 중국에서 제 마음대로 행동해 왔다. ‘만주국’뿐만이 아니라, 나아가 주변의 5성(省)을 지배하에 두려는 획책도 있었다. 일본 내에 있어서도 청일 전쟁 이후로 중국인에 대한 멸시가 두드러진 때였다.

누구든지 인내하는 데는 한도가 있다는 것을 당시의 일본은 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뒤떨어진 사람들이라고 일본이 업신여겼던 중국은,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각 지역이 서로 다른 제도로, 지방 군벌의 지배를 지탱하던 화폐 제도 하나만을 보더라도, 영국의 도움을 받아 통일했으며,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격렬하게 싸우던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당이, 거짓말로라도 ‘항일’로 발을 맞추게 된 시안(西安) 사건은, 일중 전쟁이 시작하기 전해였다. 국민당 정부에 의한 징병 제도도 시작되었다.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시작된 전쟁은 상하이(上海)에까지 이르렀지만, 중국측에서는 국제도시에서의 전투로 인해‘일본의 횡포’에 세계의 주목을 모으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미, 부전 조약도 있었고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9개국 조약=키워드=도 있었다. 제1차 대전의 엄청난 참화에, 세계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회피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늦게 찾아온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양쪽 조약에 가입해 있으면서도, 때 늦은 제국주의인 채로 돌진해 갔다.

전쟁 개시 당시, 수상은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였다. 국민적인 인기를 얻어 그 자리에 앉은 직후였다. 하지만, 고노에(近衛)는 불확대 방침이라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결국은 군부를 추인하면서 역주했다. 뒷날, 수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시 이러한 사건이 발발한 것은 정부 사람들은 당연히 알지 못했고, 육군 본성에서도 알지 못했던, 오로지 현장에 있었던 군의 책모에 의한 것이었다” “힘이 모자라서 중국 전부가 전란에 휩싸여, 국민들 또한 이유 없는 출사(出師)로 괴로워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출사(出師)란 출병을 말한다. ‘이유 없는’출병--. 게다가 상하이(上海)에서 난징(南京)으로, 더 나아가 한커우(漢口)로 뻗어가는 전선에,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현지 조달’을 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주민들은 비참한 꼴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본에서 중국 전선에 참전한 병사를 만났고, 난징(南京)에서는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노인을 방문했지만, 들어 보면 들어 볼수록 지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신문에서는 황군의 진격을 날마다 부추기고 국민들은 전쟁의 결과에 취해 있었다.

전쟁 초에는 전쟁이 수렁에 빠지는 것을 피하려는 움직임이 일본에서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중국 독일 대사 트라우트먼을 통한 평화 공작의 시도는, 눈앞의 전과와 지워버리기 힘든 낙관 속에서 수포로 돌아갔다. “국민 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라는 성명을 발표해버리자 계획성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접근하는 미국과 중국 / 초조해 지는 일본의 위험

일중 전쟁을 더듬어 보면, 일본이 무궤도한 행동에 암담해지지만, 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주장도 일본에서는 끊이지 않는다. 특히, 정계에서는 지금까지 일중간의 불씨가 되어 왔다. 양국의 역사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이를 걱정하는 한 사람, 자민당의 노다 다케시(野田毅) 중의원 의원은, 아시아에 대해,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적어도‘대중국 21개조 요구’에서는 분명하게 일본의 침략적 행위가 전면에 나왔다”라고 말한다. 일본 측에서 할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학문의 장에서 검증해 나가야 하며, 정치의 세계에서는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 참배 문제로 일중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역사 문제는 다시 불이 붙었다.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거쳐서,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현 정권이 들어서서 이제 겨우 침착성을 되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는 어떠할까.

2 자릿수 성장으로 현저하게 대두한 중국은, 일전의 공산당 대회에서 앞으로의 5년 동안의 신체제를 정돈했다. 미국에서는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앞으로 4년간의 신체제가 정해진다. 유력한 후보,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미국과 중국은 21 세기에 있어서 최대 중요한 2국간 관계”라고까지 단언하였다. 정치적인 혼미 상태가 계속되는 일본은 ‘초조함에 가까운 내셔널리즘’(노다(野田) 씨)을 한층 더 높이게도 될 지도 모른다.

베이징(北京)과 난징(南京)에서 내가 느낀 중국 측의 잘 알 수 없는 여유는, 단지 세대 교대에 의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일중 전쟁을 둘러싼 인식은 중국에게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일부러 내세워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내부의 모순도 안고 있어 불필요한 자극은 피하고 싶은 것도 크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어쨌든 중국은 지금 바쁘다.

올해, ‘가치관 외교’라는 말이 자민당 속에서 나왔다. 하지만, 가치관이 다른 나라와 어떻게 교제를 하는가가 외교다. 내셔널리즘을 전면으로, 변해 가는 중국과 세계를 다시 일본이 오인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전쟁의 교훈은 도대체 무엇이었냐는 얘기가 되어 버린다.

후쿠다 히로키(福田宏樹)

일본은 중국에서 뻗어 나간 전선을 더 한층 타국으로 넓혀 갔다. 거기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는, 다음에.

*한국에서는 중일전쟁이라는 표기하지만, 본 기사에서는 일본의 표기대로 일중전쟁으로 합니다.

【키워드】일중 전쟁

1937년 7월부터 약 8년 동안에 걸쳐 일본이 중국을 침략 전쟁이다. 지금의 베이징(北京) 교외에서 일어난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을 계기로 전면 전쟁으로 돌입하여, 1941년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된 후, 1945년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전쟁 중, 일본은 많을 때에는 약 100만 명의 병력을 중국에 주둔시켰다. 양국의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사망자는 누계 약 45만 명이라 보고 있다. 중국 측은 1931년에 일어난 만주 사변으로부터 1945년까지를 항일 전쟁으로 간주하고 이 동안의 중국 군민의 사상자 수는 ‘3500만 여명’이라는 것이 중국 정부의 공식 견해다.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남쪽의 화북 5성으로부터도 장제스(蔣介石)가 인솔하는 국민당의 영향을 제외하려고 분단 공작에 들어갔다. 한편, 중국 측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치 항일’로 내전을 중지하고 있었다.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이 일어나자, 당초에는 불확대 방침이었던 제1차 고노에(近衛) 내각이 군부 선행으로 파견 증가를 결정해, 중국 측은 철저한 항전 태세에 들어갔다. 일본은 처음에는 ‘북지(北支)사변’, 후에는 ‘지나(支那)사변’이라 부르며,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지만, 이는 미국의 중립법 적용을 초래해 군수물자의 수입이 막히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8월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전투가 시작되고, 승리한 일본군은 더 나아가 수도 난징(南京)으로 진격해 12월 13일에 점령하였다. 이를 전후로, 병사도 민간인도 구별하지 않고 난징(南京)대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이 뿐만이 아니라, 일본군은 이 전쟁에서 독가스와 세균을 사용하고, 인체 실험을 했으며, 성 폭력 등 비인도적인 행위를 거듭하였으며, 무차별 폭격도 가했다.

국민당 정부는 난징(南京)에서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겨서 항전을 계속했다.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도 게릴라전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부전 조약과 9개국 조약을 개의치 않는 일본의 전쟁 행위는 국제사회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지만, 1941년에는 대미영 개전으로 전선을 확대해 갔다.

【키워드】9개국 조약

1922년 2월, 미국의 요청으로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 그리고 일중 양국의 총 9개국이, 중국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의 존중, 문호 개방, 기회 균등 등을 확인하고 합의한 조약이다. 무력으로, 중국에게 새로운 권익을 요구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는 목적이 있었으며 동시에, 구미 제국주의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메모】고노에 후미마로

1891~1945) 일중 전쟁에서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3번 수상을 역임했다. 공작 고노에 아쓰마로(近衛篤麿)의 장남으로 태어나, 귀족원 의장 등을 거쳐서 1937년 6월에 제1차 고노에(近衛) 내각을 발족시켰다. 직후부터 시작된 일중 전쟁에서는 전선을 확대시켜, 난징(南京)을 공략한 다음 달인 1938년 1월에 “이후 국민당 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라는 성명을 내고 평화의 길을 닫아 버렸다. 같은 해, 국가 총동원법을 성립시켜 전시 통제 경제를 추진하고, ‘동아 신질서’를 주창한 제2차 고노에(近衛) 성명을 발표했다. 1940년 제2차 내각에서는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를 결성하는 한편,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었다. 제3차 내각에서 일미 평화 교섭에 실패하여 총사직한다. 전후, A급 전범 용의으로 출두를 명령받아 음독자살했다.

【메모】 장제스 (蔣介石)

1887~1975) 중국 저장성(浙江省) 태생이다. 이름은 ‘중정(中正)’으로, 제스(介石)는 성년이 된 후의 이름이다. 일본에 유학한 후, 쑨원(孫文)의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1928년에 난징(南京) 국민당 정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외국과 싸우려면 우선 국내의 안정이 필요하다고‘안내양외(安内攘外) ’를 내걸어,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을 우선시했다. 그러나 1936년 12월, 항일을 위해 내전 중지를 요구하는 장쉐량(張学良)등에 의해 시안(西安)에 감금되었다(시안(西安)사건). 파견되어 온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来)등의 설득도 있었기에 요구를 받아들이고 난징(南京)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국민당 정부군을 인솔하여 공산당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일본이 패전한 후, 1949년,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지자, 타이완(台湾)으로 피해 사망할 때까지 초대 중화민국 총통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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