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 시위 현장 리더로 활동했던 아키야마 히로시 씨. 사진기자 등을 거쳐 기업법무 전문 변호사가 된 그는 “전공투의 활동은 정치투쟁이라기보다는 문화투쟁에 가까웠다”고 회고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일본 경찰이 1968년 7월 학생들이 점거한 채 장기 농성을 벌이고 있는 도쿄대 야스다 강당 주변을 포위하고 있다. 사진 제공 아사히신문
“시대 분위기 휩쓸린 日 전공투, 열기 식자마자 소멸”
《프랑스의 68혁명이 세계를 뒤흔든 1968년은 일본 학생·좌파운동사에서도 전환점을 이룬 해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 반대투쟁 이후 가장 격렬한 학생운동이 그해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젠쿄토)’의 주도 아래 벌어졌다. 운동은 이듬해 1월 경찰기동대가 도쿄(東京)대 야스다(安田) 강당을 점거한 학생들을 진압하면서 고비를 맞았다. 2007년 겨울 도쿄 중심가인 유라쿠(有樂) 정 덴키(電氣) 빌딩에 자리한 야나기다노무라(柳田野村) 법률사무소. 이곳에서 만난 아키야마 히로시(秋山洋·61) 변호사는 당시 도쿄대 4학년생으로 전공투의 시위 현장 리더로 활동했다.》
“야스다 강당과 연대하자!”
학생들이 접수한 야스다 강당에 진압대가 몰려들면서 공방전이 시작된 1969년 1월 18일, 그는 도쿄 중심가인 간다(神田)에 있었다. 학생 3000여 명이 바리케이드로 일대를 봉쇄하고 ‘해방구’를 만들어 기동대와 대치했다. 도쿄대 학생 350명의 현장 지휘가 그의 임무였다.
“도쿄대 학생들이 바리케이드 밖으로 돌격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체포되건 다치건, 그 학생의 인생에 큰 영향을 남긴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야스다 강당과 연대하자’고 외치면서도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고, 싸움에 전망이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이튿날인 19일 저녁 야스다 강당은 ‘함락’됐다. ‘해방구’도 다시 닫혔다. 대중과의 접촉을 잃은 투쟁은 과격해져갔다.
“우리 세대에겐 베트남전쟁이 공통분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이 매일 베트남에서 죽어갔어요. 학생들은 ‘전쟁에 협력하지 말라’고 정부에 요구했습니다.”
세계적 격동기,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저항정신을 가진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 변화를 주도하던 시기였다. 프랑스 68혁명을 베이비붐 세대가 주도했듯이, 일본에서도 마침 대학생이 된 단카이(團塊·1947∼1949년생) 세대가 선두에 섰다.
아키야마 변호사는 그해 2월 학교 정문 앞에서 기동 대원에게 체포됐다. 봉쇄된 캠퍼스에 들어갔다며 건조물 침입죄가 적용돼 3일간 구류를 살고 풀려났다. 약속돼 있던 취직자리가 취소됐다.
1971년 그는 일본을 떠났다. 프랑스 파리대 영화연극학과에 적을 두고 사진을 찍어 잡지에 팔았다. 그해 발생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취재하는 사진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시라케루(흥이 깨지다, 퇴색하다)’가 유행어가 돼 있었다. 투쟁 현장을 떠난 단카이 세대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산업전사로 변신해 고도경제성장기를 이끌었다.
그도 1973년 귀국 후에는 미국계 광고회사에서 일했다. 30세를 넘겼을 때 옛 동료들의 권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사법시험 준비 서클에 합류했다.
그 뒤 기업법무 전문 변호사로 20여 년. 늘 옛 동료들을 의식했고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고 그는 말했다.
―요즘도 동료들이 자주 모입니까.
“누군가 죽었을 때 가장 많이 모입니다. 학원투쟁이 있고 나서 10년 후까지 자살자가 속출했습니다. 친한 친구도 5, 6명이 죽었습니다.”
―일본 전공투의 열기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빨리 사그라졌는데요.
“당연한 일입니다. 전공투에는 분위기에 휩쓸린 시대적 열정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야스다 강당에 걸린 슬로건이 ‘자기 부정’ ‘도쿄제국대학 해체’였습니다. 전공투는 조직원 명부도 행동강령도 없는 단순 운동체에 불과했습니다. 스스로 전공투라고 생각하면 전공투가 됐고, 시위의 취지에 찬성하면 참가하는 식이었죠. 열이 식은 뒤엔 순식간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리 68혁명의 주인공들이 68혁명을 문화투쟁으로 해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전공투는 정치투쟁이라기보다는 문화투쟁에 더 가까웠다’고 설명했다.
“혁명투쟁의 목적은 ‘권력 타도 및 쟁취’가 되어야 맞지만 전공투 참가자들은 스스로 권력을 가질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준다고 해도 싫다며 도망갔을 겁니다.”
―전공투의 일부는 이후 적군파 등 과격파로 치달았죠.
“투쟁의 법칙상 당연한 얘기입니다. 다음 투쟁 방향을 논의하다 보면 항상 강경 노선이 멋있어 보입니다. 젊은이들은 과격하게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졸업 후 일본을 떠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사회) 안에 있으면 잘 모릅니다. 밖에 나가면 좀 더 멀리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고 시각도 바뀝니다.”
―일본의 전공투 세대는 한국의 386세대와 유사점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의 386세대는 권력을 얻기도 했지만 뭔가 길을 잃었다는 느낌도 듭니다.
“흑과 백, 둘밖에 모르는 사고방식은 위험합니다. 선택의 보기가 5개 이상은 돼야 합니다. 시야를 좁히면 좌절했을 때 길이 없어집니다. 나만 옳다며 자기 생각에만 집착한 친구들은 지금도 스스로 고립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상이란 스스로를 배반하기도 하는, 매우 불안한 것입니다. 다만 정의감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재미있는 시대를 살아왔지만, 무엇이건 재미를 찾으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축이건 그림이건 오페라건, 좋은 것도 공부를 해야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학생운동 당시에는 주제넘게도 ‘세계’를 생각했습니다. 후설도 사르트르도 니체도 잘 모르면서 아는 척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 까치발을 세워본 덕에 그나마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공부를 너무 안 해서 안타깝습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 1960, 70년대 日 좌파운동
도쿄대 사건 이후 전공투 쇠퇴
소수 적군파 극단주의로 자멸
유럽이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1960년대 역시 학생운동의 시대였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에 반대해 이를 개정하자는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운동은 좌파의 영향하에 있던 ‘전국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젠가쿠렌)’이 이끌었으나 곧 당파 간 노선싸움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학생들로부터 고립돼 갔다.
이와 달리 1965년 이후 등록금 인상, 교원 임용 등 학내 문제를 걸고 투쟁을 시작했던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젠쿄토)’는 당파를 초월한 대중학생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전공투는 전성기인 1968년 말 일본 전국 116개 대학에서 학내 분쟁을 일으켰고 15개 대학을 점거했다.
이 중에서도 도쿄대 야스다(安田) 강당은 일본 학생운동의 상징이었다. 학생들은 1968년 7월부터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은 이듬해 1월 18일 8000여 명의 경찰기동대 진압 작전으로 야스다 강당이 불타고 농성 학생이 전원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날을 기점으로 학생운동도 세가 기울어 갔다.
그러나 일부는 소수 과격화됐다. 특히 적군파는 1970년 3월 도쿄에서 후쿠오카(福岡)로 가는 여객기 요도호를 공중 납치해 평양으로 날아가면서 그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일본 국내 적군파의 활동은 1972년 2월 일어난 아사마(淺間) 산장사건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경찰에 쫓겨 산악지대를 떠돌던 적군파 일부가 산장에 난입해 인질을 잡고 무려 열흘간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대치하다 검거됐다. 검거작전은 전국에 생중계돼 최고 89.7%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 뒤 경찰 조사에서 이들이 도피 과정에서 29명 중 14명을 ‘처형’ 명목으로 살해한 사실이 드러나 일본 국민에게 충격을 안겼다.
일부 살아남은 적군파는 1972년 5월 이스라엘 텔아비브공항 총기 난사 사건 등을 일으키며 국제테러세력으로 부상했다. 일본의 좌익세력은 결국 내분과 극단화를 통해 자멸의 길을 걸은 셈이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