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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무시하라는 증거를 배심원은 더 잘 기억한다?

입력 | 2007-12-28 02:57:00


새해부터 시행되는 국민참여재판(배심제 재판)을 앞두고 열린 19차례 모의재판이 얼마 전 끝났다. 올해 6월 제정된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행된 모의재판은 실제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를 지켜본 법조계와 학계의 평가는 일단 합격점.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배심원들에게 몇 가지 독특한 심리 현상이 발견됐다. 본보가 법원행정처를 통해 입수한 모의재판 시나리오를 통해 배심원이 알아야 할 몇 가지 법정 심리 상식을 살펴봤다.

○ 배심원 선정이 까다로운 이유

9월 1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법정에서 열린 모의재판. 이날 재판은 30대 여성이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다 알게 된 내연남의 아내를 살해해 2004년 15년형을 선고받은 실제 사건을 다뤘다.

재판은 배심원 선정에서 시작됐다. “억울한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변호사) “많다고 생각한다.”(배심원 후보자) 검사는 “공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 우려가 있다”며 이 배심원에 대해 기피신청을 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수사기관이 강압적으로 수사한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언론보도를 보면 의문이 있다”고 답한 후보도 불선정 결정을 받았다. 이날 배심원 선정은 모두 4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배심원 선정 절차가 이렇게 까다로운 이유는 재판 과정에서 ‘편견’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서.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아이를 둔 부모 배심원은 대체로 아동 성폭행 피의자를 비판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이럴 경우 자칫 억울한 피의자에게 불리한 평결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피고인에 대한 심리 과정에서도 독특한 현상이 발견된다. 증거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배심원은 정식 증거가 아닌 다른 요소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 지문이나 족적, DNA 같은 객관적 증거가 남지 않은 살인 사건이나 아동 성폭행 사건처럼 객관적인 정황 파악이 어려운 경우에는 더 그렇다. 이런 경우 판사가 “증거가 아니니 무시하라”라고 지적한 순간 오히려 뇌에 강렬하게 각인된다. 흔히 참고자료로 제시된 거짓말 탐지기 검사 결과를 믿게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 목소리 큰 배심원 평의 주도

대체로 소극적인 사람은 목소리가 큰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배심원들이 죄의 유무를 함께 논의하는 과정(평의)에서도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이 교수는 “배심원단도 다양한 성격의 사람이 모인 집단이다 보니 목소리 큰 사람이 평의를 주도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이번 모의재판이 치러지는 과정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대법원 이재석(판사) 형사정책심의관은 “일부 재판에서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펴는 배심원이 실제 평의를 주도했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이들은 메모를 잘 하거나 기억력이 좋은 정확하고 꼼꼼한 성향을 지녔다”고 했다.

변론 순서도 배심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행법은 최종 진술은 검찰, 변호인, 피고인순으로 이뤄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뇌는 복잡한 상황에서 단기 기억에 더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럴 경우 가장 먼저 얘기한 검찰 측 주장에 대한 기억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도 학계와 법조계는 국민참여재판 시행은 법 구현에 긍정적 측면이 많다고 공감한다. ‘증거 중심’ ‘공판 중심’의 재판이 가능해지고 살아 숨 쉬는 법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심의관은 “무엇보다 증거에 근거한 공정한 재판이 이뤄질 수 있다”며 “배심원제를 오랫동안 운용해 온 미국의 경우도 제도를 계속해서 보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심리학회도 이런 문제를 전문적으로 조언하기 위해 이달 초 학회 안에 30명 규모의 전문가로 법정심리분과를 구성했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