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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허문명]이름 숨긴 기부

입력 | 2007-07-13 03:08:00


머리카락이 희끗한 초로(初老)의 여성이 한 달 보름 전 고려대 의료원에 찾아가 땅문서를 내놓았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시가 400억 원 상당의 땅이다. 그는 “몇 차례 진료를 받으면서 의료원과 인연을 맺었다. 연구와 진료에 보탬이 되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한사코 이름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좋은 일을 해 놓고 혹여 가족과 친구들을 잃는 일이 생길까 걱정돼서….”

▷‘가족과 친구들을 잃을까 봐’라는 익명(匿名) 기부의 이유에 이래저래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러 갈래의 상상이 가능하다. 평생 모은 큰 재산을 교육사업이나 사회사업에 쓰는 자선가들 중에는 자손이나 친척과 심한 갈등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속권자들로서는 ‘가만히 계시다 돌아가시면 다 우리에게 돌아올 재산인데…’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친척들은 ‘우리도 어려운데 한 푼도 안 주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 큰돈을 쓰나’ 하는 섭섭함을 느낄 수도 있다.

▷아무튼 익명이든 실명이든 이런 거액 기부는 역시 아무나 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더구나 개인이 내는 대학기부금으로는 국내 사상 최대 액수다. 이(李)씨라는 성만 알려진 이 60대 여성은 교육계에 몸담았다가 운송업을 해 수백억 원대의 재산을 모은 모친에게서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돈을 잘 쓰는 것은 잘 벌거나 잘 간수하는 것보다도 어려울지 모른다.

▷이 씨는 모친에게서 “남들이 재미있다는 것도 막상 해 보면 별 거 아니고 아무리 좋은 것도 흔해서 익숙해지면 시들해진다. 부잣집에 태어나 누릴 것 누리며 살았으니 재물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항상 남을 도와주라”고 배웠다고 한다. 우선 그 어머니가 범상치 않았음을 느낄 수 있지만, 어머니의 유산을 알뜰살뜰 관리하다 전액 사회에 되돌린 딸의 ‘실천’ 역시 비범하다.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욕을 먹으며 벌어들인 막대한 재산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면서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