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어제 전체회의를 열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평가포럼(참평포럼)’ 발언이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대통령의 자제와 재발 방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노 대통령은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두 번이나 선관위로부터 같은 경고를 받은 데 이어 이번에 세 번째 경고를 받았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국법질서를 앞장서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와 선관위의 경고를 무시하고 거듭 법질서를 훼손했다는 점에서 헌정(憲政)의 위기이다.
대통령의 임기는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라는 선서로 시작한다. 헌재는 2004년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 결정문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과 정치적 권위는 헌법에 의해 부여되며, 민주정치의 역사가 길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헌법을 수호하려는 대통령의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헌재의 역사적 결정을 존중하기는커녕 다시 야당과 야당 소속 대선주자들을 비방하며 노골적으로 법률을 위반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탄탄한 법치(法治)의 기반 위에서만 존립한다. 대통령이 법률을 조롱하고 헌법기관을 경시(輕視)하고도 온전한 나라는 법치국가라고 하기 어렵다. 명색이 6월 민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권위주의를 청산했다고 자랑하면서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이 돼 가는 현실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선출된 권력의 오만이 아닐 수 없다.
선출된 권력의 ‘헌법 輕視’ 오만
청와대는 중앙선관위의 결정을 앞두고 전례가 없는 변론 요구를 하는가 하면 자격도 의심스러운 헌법소원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중립 위반’ 결정이 난 뒤에도 “대통령의 정치행위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며 법적 대응을 공언했다.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소추 사태를 불러온 2004년의 상황을 연상시키는 행동이다. 헌재는 역사적인 탄핵심판 결정문에서 ‘모든 공직자의 모범이 돼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법률을 공개적으로 폄훼한 것은 법치국가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자 헌법을 수호해야 할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또다시 지위를 이용해 선관위를 압박하며 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흔들고 있다.
노 대통령이 법을 위반한 정도에 비추어 우리는 이번 선관위의 결정이 미약했다고 본다.
노 대통령의 선거 중립 의무 위반 발언은 ‘누범적(累犯的)’ 성격이 있다. 먼저의 두 차례보다 이번 참평포럼 발언의 수위가 훨씬 더 높다는 게 법조계의 일반적 관점이다. 3시간 동안의 토론을 거쳐 이뤄진 표결에서 사전 선거운동 또는 공무원의 선거운동 금지 조항 위반이라는 견해가 4 대 3으로 다수였으나 선관위원장이 표결권과 결정권을 행사해 위반이 아닌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선관위가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 이렇게 무른 태도로 나가서는 대선 관리를 엄정하게 해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선관위 청와대 눈치 본 것 아닌가
노 대통령은 2004년 두 차례에 걸친 선관위의 경고도 승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아예 선관위의 결정이 있기 전부터 ‘불복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유사한 선거법 위반 언행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선관위는 그 점을 고려하지 않고 종이호랑이 같은 결정을 내리는 데 그쳤다.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에 대한 비판이 야당과 언론의 부정적 국정평가에 대한 반박 성격이라 계획적인 선거운동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도 지나치게 소극적인 해석으로 생각된다. 한나라당 대선주자 후보군이 두 명으로 사실상 압축됐고 인터넷 매체가 중개하는 가운데 노 대통령의 공격은 이명박, 박근혜 씨 두 주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며칠에 걸쳐 연설문을 작성했다고 스스로 고백한 것을 보더라도 선거법 위반의 계획성 능동성(能動性)이 인정된다고 봤어야 옳다.
노 대통령은 즉각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 그리고 사전 선거운동의 논란을 부른 대통령의 홍위병 조직 ‘참평포럼’도 해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