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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知논술/지혜의 숲]형이상학을 위하여

입력 | 2006-12-26 02:57:00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그 가공할 위력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인간의 손에는 지구를 몇 번 박살내고도 남을 만한 양의 폭탄이 쥐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철학자들도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현대 과학철학자 미셸 세르는 “원자탄이 터지기 이전과 이후의 철학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거기다 지구 환경은 우려의 수준을 넘고 있다. 언제 남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 바다가 땅덩어리들을 집어삼킬지, 언제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상의 생물들이 모조리 멸망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기술의 발달이 인류를 행복하게 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대재앙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철학자들은 이러한 기술 문명을 뒷받침하고 있는 서양 전통철학, 즉 형이상학에 비판의 칼날을 겨누게 되었다.

그리하여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과제가 현대 철학계의 중심적 화두로 떠올랐다. 철학자들은 종래 형이상학의 원리들과 거꾸로 가는 주장을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되었다. 형이상학의 본질이 세계에 대한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적 사유는 계산적 사유로서 그 역시 ‘세계 지배적’이고, 자기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개인이나 종족 또는 국가의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며, 주체나 의지를 강조하는 것 역시 권력적 사유의 허구라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구조주의, 타자성의 윤리, 포스트-모더니즘 등은 △문화적 구조나 시대의 인식방식에 따른 주체의 소멸 △무의식에 대한 의식과 이성의 허구성 △동일성에 대한 타자성의 우월 등을 근거로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그들의 사상이 유행하였다. 구조주의에 대해서는 각 문화의 독자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서양 철학이 돌고 돌아 결국 동양의 노장철학이나 불교철학에 가깝게 되었다는 점에서 환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사상에 따르면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은 문제를 문제로서 직시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란 사실 ‘사물을 파악하는 또 다른 눈’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육안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학문을 할 필요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의 여러 측면을 탐구하고 거기서 숨겨진 사물의 내적 본질을 끄집어내어 보자는 것이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을 제국주의적으로 보는 것은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읽히는 대목이다. 형이상학으로 강해진 나라가 제국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강한 힘을 침략에 사용한 것이 나쁜 것이지 강해졌다는 사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즉, 형이상학이 제국주의적이라는 것은 형이상학과 거기에서 나온 힘의 사용법을 서로 구별하지 못한 결과이다.

형이상학과 이성이란 사물을 보는 ‘눈’이며,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있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원자탄과 환경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형이상학을 뒤집자는 것은 눈이 있어서 나쁜 대상이 보이기 때문에 눈을 찔러 없애자는 말과 같다. 문제가 심각하면 할수록 더욱 더 눈을 부릅뜨고 문제를 봐야 한다. 사실 형이상학을 극복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 자신의 시각 자체가 이미 형이상학적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형이상학과 같은 고도의 추상적 원리를 문제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하자는 생각을 했을 것인가.

이제 엉뚱하게 형이상학에 문제의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직시할 때이다. 당장 환경문제만 하더라도 새로운 친환경적 기술을 개발하는 것 이외에 우리가 가진 해결책이 있는지, 독자들 자신이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최화 경희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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