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변에서 백은 수를 내러 갔다가 중도에 후퇴했다. 실리도 별로 챙기지 못하고 흑을 두텁게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박영훈 9단은 이창호 9단 못지않게 신중하다는 소리를 듣는 기사인데 경솔하게 움직였다. 이 9단은 형세가 나쁘지 않는 한 수가 보여도 모른 척 지나가기 예사다. 예상하지 못한 반격을 염려해서다. 오죽하면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도 건너지 않고 돌아간다’는 말이 나왔을까.
흑(○)을 두텁게 만들어준 여파는 당장 101, 103으로 나타났다. ○ 한 점을 품었던 백의 집이 다 없어지며 대마가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바둑이 엷으면 이처럼 시달린다. 흑 111로 튼튼하게 이었다. 어서 대마를 살려가라는 얘기다.
7분을 고심하던 박 9단이 백 112로 승부수를 던졌다. 이렇게 버티지 않으면 계가를 맞추기 힘들다고 본 것이다. 참고도 흑 1로 막는 것은 백 2의 선수에 이어 8까지 수가 난다. 흑은 A로 끊을 수 없다. 백 B, C면 야단이다.
집을 빼앗겼으므로 이제는 흑도 대마를 한껏 공격하여 대가를 받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흑 115로 공격 나팔을 불었다.
해설=김승준 9단·글=정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