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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69년 美‘우드스톡 페스티벌’ 개최

입력 | 2006-08-15 03:00:00


1969년 7월 미국인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 표면을 걸었다. 그러나 이런 국가적 경사 앞에서 미국인들은 예상외로 담담했다. 이를 축하할 만큼 그들의 심경은 편치 못했다.

대외적으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인종차별에 도전하는 민권운동이 불붙고 있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풍요 속에서 자란 미국 젊은이들에게는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다.

한편에서는 정치적 저항 정신이 싹텄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탈과 쾌락의 문화가 지배했다. 이 두 가지 시대정신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건이 바로 우드스톡 페스티벌이었다.

이 행사는 원래 포크가수 밥 딜런의 고향인 우드스톡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히피 젊은이들이 몰려들 것을 우려한 우드스톡 주민들의 반대로 행사는 결국 인근 소도시인 베텔에서 열리게 됐다.

1969년 8월 15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 축제에는 조앤 바에즈,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등 당대 최고의 록·포크 가수들이 총출동했다. 참가자는 45만∼50만 명에 이르렀다. 주최 측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10배 정도 많았다.

사흘 내내 장대비가 내렸다. 행사장은 진흙탕으로 변했고 식량, 화장실, 의료장비도 절대 부족했다. 뉴욕 주는 행사장 주변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기 직전까지 갔다. 반전 구호를 외치며 군대에 혐오를 드러내던 젊은이들이 군 헬리콥터로 음식물과 의료품을 조달받는 아이러니도 발생했다. 마약과 섹스가 난무했지만 별다른 폭력 사고는 없었다.

이후 ‘우드스톡’은 ‘워터게이트’와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의 한 시대를 규정짓는 고유명사가 됐다. 사회운동가 애비 호프먼은 기성세대의 가치를 부정하는 젊은이들의 공화국이자 해방구라는 의미에서 ‘우드스톡 네이션(국가)’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사흘 동안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톱뉴스로 보도했던 뉴욕타임스는 행사가 끝난 후 첫 번째 사설에서 “이런 난장판이 무슨 문화인가”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다음 날 신문의 논조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비록 세상을 바꾸겠다는 일관된 세계관은 없었지만 그들은 훗날 이날을 기억하며 ‘순수의 시간’을 되돌아볼 것이다. 헨리 5세가 전투를 앞두고 했던 유명한 연설처럼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늘을 보내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는 오늘의 일들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가슴이 뛸 것이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노라고….’”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