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의 위성국에서 살다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러시아로 들어가 감자 캐는 삯일을 하고 있는 고려인 2, 3세들
고려인 2, 3세들이 사는 바곤치키
■ ‘고려인의 삼촌’ 미하일 일리치 김 씨
“동포들 관심-투자 필요, 北처럼 손벌리진 않아”
“여기는 북한처럼 ‘형편이 어려우니 돈을 거저 달라’고 하지 않아요. 한국 정부나 기업이 동포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거나 투자를 하면 비즈니스 기회도 잡을 수 있어요.”
러시아 서남부 아조프 시에서 100만 평 규모의 농장을 경영하며 국경을 넘어오는 고려인을 도와주고 있는 미하일 일리치 김(59·사진) 씨. 그의 농장에 일하러 온 고려인들은 그를 ‘자주시카’라고 불렀다. 러시아어로 백부 또는 삼촌이란 애칭이다. 이곳에서 일하면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농장보다는 아무래도 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돈도 더 많이 받는다고 했다.
김 씨는 부모에게 배운 한국말을 잊지 않아 러시아어로 얘기하다가도 몇 마디씩은 한국말을 섞어 쓰곤 했다. 그의 부모는 스탈린 사망 후인 1954년 우즈베키스탄에서 로스토프 지역으로 이주해 토마토 양파 등을 재배했다. 그가 거대한 농장을 갖게 된 것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작물 재배와 농장 관리 노하우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23일 그의 승용차를 타고 감자 파 해바라기를 기르는 농장과 종자 농기계를 보관한 창고를 둘러보았다. 그의 농장은 여의도의 절반 크기. 설명을 들으며 돌아보니 5시간이 훌쩍 넘었다. 그는 고려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이 소유한 농장도 관리해 줄 만큼 현지에서 신망이 높다.
요즘은 채소를 내다 팔기 위해 도시 상인들의 전화를 받는 게 일과다. 차를 운전하는 동안에도 이따금 전화로 가격을 흥정했다.
“상인들이 부르는 가격이 지난해보다 낮아지기도 합니다. 가격은 낮아도 수확 철이 되기 전에 밭째로 사들이겠다는 상인이 나타나면 고맙지요.”
밭에서 일하는 고려인들이 보였다.
“사회주의 붕괴 후 고려인 10만여 명이 이 지역에 몰려든 것을 알고 놀라는 동포도 많습니다. 동포들이 관심을 갖게 되면 일하는 사람들의 처지도 나아지겠지요.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합법적인 주거 시설을 빨리 지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곳을 가난하니까 무조건 도와줘야 하는 곳으로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국 기업이 투자 차원에서 이곳의 농산물 저장 창고나 가공 공장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답니다.”
▼돈 강에 찬바람 스치면 또 어디로 갈지…▼
고려인 강제이주 70년… 유랑의 대물림 현장
《8월은 러시아 내 고려인(카레이스키)들의 운명이 결정된 달. 1937년 8월 소련의 인민위원회와 공산당은 ‘극동지방 국경 부근의 한인(韓人)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강제 이주의 시작이었다. 러시아 동부 연해주에 모여 살던 한인들은 강제로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실려 갔다. 강제 이주 70년째를 맞는 지금. 스탈린의 그 소련은 러시아로 이름을 바꿔 ‘넘쳐 나는 오일달러’로 흥청대고 있지만, 고려인들의 고단한 유랑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러시아 볼고그라드와 연해주에서는 15만 명 이상의 고려인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돌고 있다.》
“할아버지는 벌판에 굴을 파고 지냈는데, 숲 속에 바곤치키(임시 막사)를 짓고 사는 우리는 그것보다는 낫지요.”
지난달 23일 모스크바에서 서남쪽으로 1200여 km 떨어진 아조프 시 자이모아브림 마을의 감자 수확 현장. ‘고요한 돈 강’에서 가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한낮의 기온은 25도까지 올라갔다.
감자를 자루에 담고 있던 고려인 블라디미르 유(가명·36) 씨는 인터뷰를 요청하자 검은 흙이 묻은 면장갑으로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은 뒤 작업반장의 눈치를 먼저 살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으로 러시아 국경을 넘어온 유 씨는 러시아어로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 일당으로 20kg짜리 감자 한 자루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휴식 시간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나자 유 씨와 함께 일하는 고려인 2, 3세들이 몰려왔다.
○ 끝없는 유랑
이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은 1937년까지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의 극동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 명령으로 화물차를 타고 연해주에서 서쪽으로 약 6000km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왔다.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넘어 이 마을에 왔다는 레오나르드 김(가명·53) 씨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풀만 자라던 황무지에 토굴을 파고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독한 겨울을 견뎌 냈다”며 눈물을 훔쳤다.
고려인 2, 3세들은 1세대가 땀 흘려 이룩한 삶의 기반을 물려받을 기회가 없었다. 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소련에 속해 있던 나라들이 독립국가가 되면서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됐다. 이 바람에 카자흐스탄 등 비교적 경제가 안정된 국가에 살던 고려인들은 직장에서 추방당했다.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가난한 국가에서는 대부분의 땅이 국가나 대지주에게 넘어갔다. 고려인들은 소작농으로 일하거나 노동력을 팔아도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 고단한 생활의 대물림
고려인 2, 3세들이 생계를 위해 다시 이동한 곳은 러시아 남부 흑토지대인 로스토프와 볼고그라드 주(州). 러시아에서는 천혜의 곡창지대로 꼽히고 있지만 고려인들은 아직도 떠돌이 품팔이 신세였다.
23일 오전 로스토프나도누 공항에서 46km를 달려가자 농로 중간에 숲이 나왔다. 숲 속에는 비닐로 지은 임시 막사가 몰려 있었다. 국경을 넘어온 고려인들이 가족과 함께 지내는 ‘바곤치키’였다. 우리말로 옮기면 ‘차량 짐칸으로 만든 주거 시설’이다.
막사에 남은 노인이나 여자들은 수도가 없어 지하수를 파고 전기나 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화덕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로스토프 지역에서 일하는 고려인들은 그나마 형편이 좋다는 것. 30대 중반의 고려인 여성은 “볼고그라드에서는 작년 겨울 고려인들이 영농비용 때문에 진 빚을 갚지 못하고 숲 속이나 들판에서 지내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전했다.
로스토프와 볼고그라드로 몰려드는 고려인은 현지 거주민과 유동인구를 포함해 12만 명에 이르며 이 중 90%가 농업에 종사한다는 게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의 추산이다.
○ 쫓기는 신세
감자 수확 현장에서 만난 고려인 2, 3세들은 가난한 유랑생활에 워낙 익숙한 때문인지 빈곤문제는 오히려 뒷전이었다.
그보다 더 큰 고민은 불안한 신분과 경찰의 추격. 볼고그라드 주에서 파 농사를 짓는다는 한 청년은 “작년 겨울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가 경찰에게 걸려 벌금 1200루블(4만2000원)을 물고 겨우 풀려났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러시아보다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 고려인 후손들은 국경을 넘기 위해 3개월짜리 단기 비자를 받는다. 기간이 만료되면 국경지역으로 되돌아가 비자를 새로 받아야 한다. 하지만 돌아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 데다 농사일이 비자 기간 안에 끝나지 않아 불법체류자가 되기 십상이다.
러시아 경찰은 비자가 있더라도 행정당국에 등록된 일정한 주택에서 살아야만 합법적인 체류로 인정한다. 올해 6월에 비자를 받았다는 유 씨는 “바곤치키에서 생활하는 우리가 무슨 돈으로 건물 주인이 있는 집을 얻을 수 있겠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 부농(富農)도 설움은 매한가지
볼고그라드에서 수박 농장을 운영하는 게오르기 이(가명·56) 씨는 지난해 7월 수박과 참외를 도로 주변에 버려야 했다.
힘들여 재배한 과일을 트럭에 싣고 북쪽으로 1000km가량 떨어진 모스크바 시내 대형마트에 직접 내다 팔려고 했지만 시 외곽에서 경찰 검문에 걸려 되돌아와야 했던 것. 이 씨는 “시든 참외와 수박을 버리면서 농사일을 그만두는 문제까지 고민했다”고 털어놓았다.
수확 철인 요즘 도시 상인의 ‘가격 후려치기’ 횡포도 여전하다. 볼고그라드에 소형 농장을 갖고 있는 한 고려인은 “농산물을 저장할 창고나 가공 공장이 없어 농산물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없다”며 “도시 상인이 부르는 대로 채소와 과일을 헐값에 내다 파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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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프=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