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고 대 스위스전이 열린 19일 독일 도르트문트 시내는 온통 스위스의 붉은 색 물결이었다. 이따금 눈에 띄는 노란색 토고 티셔츠도 갈색 머리의 독일인이 입은 것이었다. 기념품점에 들어가 보아도 토고 국기는 없었다. '스위스 혼자 경기를 치르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응원장에 들어서자 '다다다다…'흥겨운 북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토고 사람 몇 명이 손북을 두들기며 흥겨운 응원을 펼치고 있었다. 전반전이 끝난 뒤 응원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던 덩치 큰 사내에게 다가갔다. 프린스(25)씨로 시내 식당의 요리사였다.
-언제 독일에 왔나.
"93년 부모님과 함께 왔다."
-오늘 이길 것 같은가.
"봤지 않은가. 한골 먹었지만 스위스를 몰아붙이고 있다. 프랑스도 잡고 16강에 오를 거다."
토고인이 경기 때마다 승리를 위해 사용한다는 '주술'에 대해서도 효험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내 형제들도 무당의 힘으로 여러 번 사고와 병에서 벗어났다"고 답했다. "확실히 믿느냐"고 되묻자 그는 "확실한 게 어디 있느냐"며 '씨익' 웃었다.
토고 수도 로메 근처의 바닷가에서 그도 어릴 때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라도나'는 공을 차며 허기를 달래던 그 시절 토고 소년들의 영웅이었다. 지금도 음산한 가을이 오면 햇빛 찬란한 바닷가에서 뒹굴던 어린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큰 돈을 만져보자는 생각에 온 가족이 택한 독일행이었다.
그에게 월드컵은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토고가 월드컵 아프리카 지역 예선을 통과하던 날, 도르트문트에 사는 토고 사람들은 잔치를 벌였다. 예전에 '토고'라면 고개를 갸웃거리던 독일인들도 토고의 이름을 익히 알게 됐다. 한국을 상대로 첫 골을 넣던 순간, 토고 티셔츠를 입은 자신을 향해 주변의 독일인 누구나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한마디로 기분 최고였다. 그렇지만 곧이어 한국의 대반격….
최근 독일 신문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소개됐다. 500여명의 토고인이 응원단을 결성해 독일에 오려 했지만 독일 정부는 이들이 불법 체류할 것을 우려해 거액의 예치금을 요구했다는 것. 돈을 마련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독일에 오지 못했다. 웃음을 잃지 않던 프린스 씨였지만 이 말을 꺼내자 순간 얼굴빛이 흐려졌다.
"독일인들은 그렇다. 말끝마다 규정을 들먹인다. 자기들이 귀찮으니까 그러는 거다. 화는 나지만 토고가 아니라 가나 또는 코트디부아르였어도 마찬가지였겠지…."
그가 고향을 떠나 독일에 온 이유도, 토고 응원단이 독일에 오지 못한 이유도 모두 '그 놈의 돈' 때문이다. 토고 월드컵 대표팀은 월드컵이 개막된 뒤에도 수당 문제 때문에 파업을 계속했다. 선수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들지 않던가? 그러나 프린스 씨는 선수들 편이었다.
"토고 축구협회가 잘못이다. 선수들이 바보냐? 성적에 자신이 있으니 수당을 요구할 것 아닌가. 연습? 걱정 없다. 선수들이 서로 잘 알고, 작전도 다 서있다…."
그와 헤어져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와' 함성이 올랐다. 후반에 스위스가 한 골을 추가한 것이다. 함성이 잦아드는 사이로 신명나는 손북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프린스 씨가 손북 팀과 온 몸을 흔들며 춤추고 있었다. 여전히 밝은 웃음과 함께.
도르트문트=유윤종특파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