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북한 이란…. 전 세계에 걸친 ‘민주주의 확산’ 정책을 펴고 있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칼날이 이번에는 유럽 대륙으로 향했다. 상대는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52) 벨로루시 대통령.
이번 조치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이어 유럽에서도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벨로루시는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했지만 현재 러시아와의 재통합을 추진 중인 러시아의 최대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뒤이어 제재=백악관은 19일 루카셴코 대통령과 내무장관 등 핵심 측근, 벨로루시 외교부 등 주요 국가기관이 미국 내에 갖고 있는 자산을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미국 국민이나 기업과의 거래도 할 수 없게 됐다.
부시 대통령은 의회에 보낸 서신에서 “유럽 전체에 이런 정권은 없다”며 루카셴코 정권의 인권침해와 부패를 그냥 넘길 수 없어 제재 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국무부의 연례인권보고서에 벨로루시를 북한 중국 등과 함께 인권침해국 명단에 올렸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3월 대통령선거에서 3선에 성공했으나 부정선거라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EU는 이미 지난달 루카셴코 정권에 대한 제재를 단행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각료와 측근 등 35명에 대한 EU국가 입국비자 발급을 거부하고 이들이 EU 영내에 갖고 있는 자산을 동결한 것.
벨로루시에 대한 서방의 제재가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이번 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릴 미-EU 정상회담에서는 벨로루시 문제가 주요 의제에 올랐다.
▽부시 대통령을 블랙리스트에=하지만 벨로루시와 그 후원국인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된다.
벨로루시 정부는 지난달 EU의 제재 결정이 있자 즉각 미국과 EU의 고위관리에 대한 입국거부 조치를 내렸다. 입국거부 대상자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여기에는 부시 대통령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구 980만 명의 소국이 이렇게 겁 없이 미국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배후에 러시아가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국제가격보다 훨씬 싼값으로 벨로루시에 천연가스를 공급하고 있다. 미국은 옛 소련권의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에 시민혁명으로 친미 정권이 수립되자 민주화 열풍이 벨로루시로 확산되기를 기대해 왔다.
하지만 루카셴코 정권의 기반이 여전히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미국의 압박이 당장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