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은 13억 중국인에게 ‘영원한 총리’로 기억되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의 30주기. 이날 중국 전역에서는 탁월한 정책가이자 실용주의자인 그를 애도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추도행사 참석자들은 그의 인격과 풍모, 애국심을 칭송했다. 중산복과 검정 코트, 중절모가 트레이드마크인 저우는 냉전시대에 미국 일본과 수교해 중국 외교사의 초석을 다진 인물. 신화통신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없었으면 공산 혁명의 불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저우가 없었다면 혁명은 재가 됐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그러나 앞서 극좌파 ‘4인방(四人幇)’ 가운데 최후의 생존자였던 야오원위안(姚文元·74)의 사망 사실이 전해진 6, 7일 중국은 조용했다. 언론도 사실만 짧게 보도했고 논평도 싣지 않았다.
야오는 중국 현대사에서 적잖은 정치적 비중을 지녔던 인물. 1966년부터 10년간 중국 전역을 뒤흔든 문화대혁명은 그가 1년 전 쓴 한 편의 서평이 발단이 됐다.
그는 원후이(文匯)보에 베이징(北京) 부시장이자 역사학자인 우한(吳함)이 쓴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비판하는 평론을 실었다. 우한의 사극이 겉으로는 명나라 시절 황제에게 상소했다 파직 당한 관리의 억울함을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마오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가 실각한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를 옹호하는 글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마오는 이를 계기로 홍위병을 앞세워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중국은 이후 10년간 계급투쟁과 평등주의를 내세운 극좌노선으로 치달았다. 야오는 승승장구해 공산당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까지 올라갔다. 1976년 9월 마오가 죽자 그는 장칭(江靑) 장춘차오(張春橋) 왕훙원(王洪文)과 함께 반혁명분자로 몰려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1996년 출소 뒤 조용히 지내던 그의 사망 소식은 숨진 지 14일 만에야 공개됐다.
10여 년 동안 고속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중국. 극좌파의 상징구호였던 ‘조반유리(造反有理·반대에는 이유가 있다)’는 이제 중국인이 잊고 싶어 하는 단어다.
반면 저우가 강조한 ‘구동존이(求同存異·같은 점을 찾아내고 다른 점은 일단 접어둔다)’는 중국 대내외 정책의 기본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하종대 기자 orion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