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인문사회]더이상 욕하지 말라…‘부르주아 전(傳)’

입력 | 2005-10-15 03:17:00


◇부르주아 전(傳)/피터 게이 지음·고유경 옮김/432쪽·1만4900원·서해문집

부르주아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번지르르한 윤리도덕의 가면 뒤에서 호박씨 까는 호색한들, 천박한 취향을 돈으로 포장하는 속물들, 어리석고 소심하며 빈틈없고 계산적이며 타협적인 존재….

이 책은 이처럼 조롱과 멸시, 천대의 대상이 된 부르주아의 복권을 시도한다. 예일대 명예교수로 서양 근현대 사상사 및 문화사의 대가로 꼽히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런 부르주아관(觀)의 부당성을 비판한다.

19세기 유럽 부르주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조차도 ‘공산당선언’에서 “100년이 채 못 되는 기간에 이전의 모든 세대를 합친 것보다도 더 엄청난 생산력을 창출했다”고 언급한 존재였다.

19세기 자신의 부르주아적 삶을 52년간 꼼꼼한 일기로 남긴 아르투어 슈니츨러(왼쪽). 19세기 부르주아들의 삶을 화폭에 담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들.

정치적으로 투표권의 확대, 노예제 폐지를 위해 투쟁했고, 자유주의 정당과 사회민주당에 표를 던짐으로써 19세기 사회를 좀 더 인도적이고 공정하게 만든 개혁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한 인사들도 그들이다. 이 시기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도시 및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놀라운 유연성을 발휘한 것도 그들이다. 인상파 그림의 가치에 가장 먼저 눈뜬 것도, 자비로 관현악단을 설립한 것도, 시인 보들레르의 찬양을 받았고, 마네의 그림 소재가 됐으며, 브람스에 의해 음악으로 표현된 이들도 바로 그들이다.

저자는 이런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과 폄훼가 이뤄진 것도 부르주아 자신들에 의해서였음에 주목한다. 법률가 아버지를 둔 플로베르는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는 모든 미덕의 시작”이라고 했고, 역시 법률가를 지망했던 모파상은 “부르주아지는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 외쳤다.

저자는 이런 19세기 부르주아의 역사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분석한다. 여기서 19세기 역사는 나폴레옹의 패전(1815)∼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1914) 기간을 뜻하는 ‘빅토리아시대’다.

그는 아르투어 슈니츨러(1862∼1930)라는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극작가의 미시적 삶을 통해 이 시대를 집어낸다.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도 의사가 됐던 슈니츨러는 14세부터 52년간 거의 매일 쓴 일기를 남겼다. 슈니츨러의 일기는 자신을 포함한 19세기 부르주아의 은밀한 욕망과 복잡한 심리를 놀라운 관찰력으로 묘사했으며 그의 소설과 연극 작품으로 승화됐다. 동시대를 살았던 프로이트조차 그를 부러워했을 정도였다.

저자는 슈니츨러의 일기에서 이 시대를 지배한 핵심 개념으로 연민과 혐오가 공존하는 ‘양가감정’을 발견한다. 슈니츨러는 평생 바람둥이로 살며 자신이 정복한 여자들과 그들과의 성관계 횟수까지 일일이 기록에 남겼다. 일례로 1887년 안나 헤거라는 평민 여성을 유혹해 11개월간 326차례의 사랑을 나눴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유부녀들과의 간통을 즐기면서도 끊임없이 숫처녀를 찾아 헤매었고, 여성의 정조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이중적 행태에 대해 ‘습관적 고문자’, ‘호색한’, ‘짐승’이라고 표현했고 자신의 체험을 소재로 남성중심주의를 조롱하는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나 그 질병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저자는 여기서 빅토리아기 부르주아들이 억압적이고 금욕적이란 기존 규정에 도전하며 그들이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변화 속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불안에 시달린 존재였다고 설명한다. 그가 부르주아의 공통된 특성으로 꼽는 것은 ‘노동의 복음’에 대한 숭배와 사생활의 불가침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 두 가지뿐이다.

슈니츨러가 10대 소년티를 못 벗었던 때인 1876년 3월 그의 아버지는 책상 서랍 속에 감춰 놓은 아들의 일기를 훔쳐 읽는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3명의 여학생과 성적 쾌락을 나눈 기록을 보고 충격을 받아 아들을 심하게 질책했고, 아들은 이를 평생의 상처로 안고 살아 가면서 자신의 난봉꾼적 삶을 주도면밀히 기록했다.

슈니츨러의 아버지가 쾌락의 절제를 통한 노동의 신성한 측면을 대변한다면 슈니츨러는 사적 공간 침입에 대한 부르주아의 불안심리를 반영한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국가정보원의 X파일 문제에 대해 노동의 신성함을 파괴한 재벌과 언론의 결탁이라는 그 내용에 격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국가가 국민의 사생활을 감시한 것에 더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일방적이고 표면적인 정치적 딱지 붙이기를 넘어서 ‘아래로부터’, ‘작은 것을 통해’, ‘두껍게’ 읽어 낼 수 있는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