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 씨는 “내게 1980년대 전반부는 독재와 민주화운동과 시, 후반부는 원죄의식과 첫사랑의 시절이었다. 달동네 시절 언젠가 탈출기를 완성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창비
◇마징가 계보학/권혁웅 지음/144쪽·600원·창비
권혁웅(38) 씨는 고려대 국문과를 나왔으며,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마징가 계보학’을 읽다 보면 “네가 이래도 안 웃어?” 하며 온갖 포즈를 다 만들어 보이는 팬터마임 배우가 떠오른다. 또한 이 시집은 시인 지망생들한테 무한한 꿈과 희망을 안겨 줄 거라고 말할 수 있다. “아, 그 어려운 시인선(選)들 대신에 만화나 에로비디오만 많이 봐도 이렇게 당당하게 시인이 될 수 있구나”하는 자신감에 눈이 번쩍 뜨인다.
이 시집은 지나간 시절의 만화 주인공을 비롯해 갖가지 대중문화의 기호들을 우리 시대의 인간 군상들 위에 겹쳐 보여 주고 있다. 타이틀 시인 ‘마징가 계보학’은 이렇게 시작한다.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판이 금세 없어졌다.’
권 씨가 이렇게 만화 주인공처럼 다루는 인물들은 그가 십대와 이십대를 보낸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일대의 산비탈 동네에 함께 살던 사람들이다. 좁은 오르막길과 지붕을 맞댄 낮은 집들, 솜 타는 마당, 봉제인형 만드는 방, 작은 구멍가게와 비에 젖은 영화 포스터가 시집 속에 보이는 듯하다. 그 풍경을 그려내는 그의 시는 유머러스하고, 코미디언처럼 장난스레 말들을 다룬다. 하지만 귀 기울여 보면 쓰라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 ‘요괴인간’의 도입부는 이렇다.
‘벰 베라 베로를 아시는가? 손가락이 세 개씩, 두 손에 도합 여섯 개밖에 없던 남매, 셋이 가진 걸 다 합쳐도 겨우 열여덟 개였던 남매, 게다가 맏이는 장님이어서 셋을 모아도 눈동자가 넷뿐이었던 남매//늘 사람이 되고 싶다고 중얼거리던 이들(…)//작은형은 공장에 나갔는데 프레스가 손가락 둘을 먹어버렸다 늘 왼손으로만 악수하던 사람, 사귀던 여자가 떠나갔는데 힘센 오른손으로는 잡을 수 없어서 대신에 세 손가락으로 엿을 먹였다고 한다(…).”
이번 시집에 캐스팅된 여러 주인공의 명단은 이렇다. 마징가, 애마부인, 투명인간, 미키마우스, 가위손, 스파이더맨, 드라큘라, 슈퍼맨, 배트맨, 엑스맨, 아톰, 원더우먼, 황금박쥐, 독수리 오형제, 돌아온 외팔이…. 이들 대부분은 지금 ‘386’이라고 부르는 세대들이 친구처럼 여기던 캐릭터들이다. 삶에 지친 가난한 이들의 투정과 울음소리가 바람벽을 통해 술술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꼬방동네’ 한가운데 살았던 ‘386’이 그 세월의 희극성을 붙잡아 시로 옮겨놓을 만큼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이 시집을 읽어 나가노라면 그 자신감으로 재구성한 1980년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지나간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 1987년의 서울엔 선데이가 따로 없었다 외계에서 온 돌멩이들이 거리를 날아다녔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선데이서울, 비행접시, 1980년대 약전·略傳’)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