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는 신들에게서 선물로 받은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상자를 열고 말았지만 그가 만일 상자의 내용물을 미리 알았더라면 봉인을 열고 후회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국가안전기획부의 불법 감청(도청) 내용이 담긴 이른바 ‘X파일’의 공개 여부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판도라를 생각한다. 판도라와는 달리 우리는 X파일 안에 대충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짐작하고 있다. 과거 정(政)-경(經)-언(言)의 충격적인 유착과 검은 뒷거래의 실태가 일부나마 이미 보도됐기 때문이다. 이를 공개할 경우의 법적 문제점과 사회적 파문이 어떠할지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정치권의 논의는 이를 공개하는 쪽으로 모아지는 것 같다. 여권의 특별법 제정 주장이나 야권의 특별검사제 법안 도입 주장 모두 파일의 공개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밑자락에 깔고 있다.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진상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잘못이 있다면 차제에 짚고 넘어가자는 논리다.
이 같은 움직임이 통신비밀보호법은 물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의 보장 등 헌법에도 어긋날 소지가 있다고 법률 전문가들은 경고하지만 정치권은 공개를 주장하는 여론에 더 큰 압박을 느끼는 것 같다. 하긴 ‘국민정서법’이 어떤 법보다 상위에 있는 게 한국의 현실 아닌가.
이대로라면 과거의 불법 행위를 불법 또는 위법적인 방법으로 파헤치고, 그 결과에 다시 법의 잣대를 들이대 관련자들을 단죄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만일 정치인들이 X파일 공개 여부를 법과 원칙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사적인 이해득실에 따라 처리하려 든다면 X파일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다를 게 없을 것 같다.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X파일 공개와 관련해 거론되는 국민의 알권리 이면엔 남의 행동을 엿보고, 엿듣고 싶어 하는 이상 심리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남의 행동이 은밀한 것일수록 이를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는 더 커진다. 그렇지만 공개를 요구하면서도 혹시 나도 도청의 대상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을 평범한 시민들조차 떨치기 어렵다.
국민의 알권리는 소중하지만 위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X파일의 등장인물과 그들의 행위를 눈곱만큼이라도 두둔하고자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X파일의 내용이 아무리 궁금하더라도 호기심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법적 안정성과 바꿀 수는 없다.
X파일 말고도 세상엔 궁금한 것이 많다. 어떻게 해야 한국이 세계 일류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주변국인 중국 일본의 발흥에 밀리지 않고 국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우리 사회에서 구현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 밝은 미래를 준비할 시간도 모자라는 판에 도대체 언제까지 과거의 늪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판도라의 상자엔 맨 밑에 희망이 있었다. 상자 속에서 쏟아져 나온 세상의 모든 재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희망 때문이다. X파일에도 그런 희망이 들어 있을까. 판도라가 지금 X파일 앞에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한기흥 정치부 차장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