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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六.동트기 전

입력 | 2005-07-21 03:10:00

그림 박순철


오래잖아 패왕 앞으로 말을 몰아온 종리매가 부끄러움 가득한 얼굴로 군례를 올렸다.

“못난 신(臣) 종리매가 대왕을 뵙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군사를 부리는 이에게는 매양 있는 일이라 하였소. 스스로를 너무 허물하지 마시오.”

패왕이 그렇게 받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장군은 어찌하여 성안에 들지 않고 골짜기로 들어갔소?”

“한왕과 주가 종공 등이 언제 뒤쫓아 올지 모르는 데다 남쪽에는 또 구강왕 경포가 적지 않은 군사로 버티고 있어 그랬습니다. 허술한 성안에 함부로 들었다가 남북에서 몰려든 적의 대군에게 에워싸이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보다 더한 낭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방으로 빠져 나갈 길이 있는 저 골짜기에 숨어 대왕을 기다린 것입니다.”

종리매가 풀 죽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패왕이 알 수 없다는 눈길로 그런 종리매를 바라보며 물었다.

“적이 그토록 강성한가?”

“유방이 관중에서 이끌고 나온 것만도 3만이 넘는 데다 무관을 나온 뒤로 여기저기서 불어난 게 또 2만이 된다 합니다. 주가와 종공이 이끌고 형양성을 지키던 군사가 만여 명이요, 경포의 군사도 그새 1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고 합니다.”

“그래봤자 10만이 넘지 않는다. 장군은 벌써 잊었는가. 지난해 우리는 팽성에서 3만 군사로 한왕 유방이 이끄는 제후군 56만을 쇠몽둥이로 질그릇 부수듯 했다. 그런 갈까마귀 떼 같은 잡군(雜軍)은 10만이 아니라 100만이라도 두렵지 않다. 과인이 보기에 장군의 허물은 싸움에 진 것이 아니라 적을 너무 크게 여겨 기세를 잃은 데 있는 듯하다.”

패왕이 그렇게 나무란 뒤에 다시 힘 실린 목소리로 종리매의 꺾인 기를 되일으켜 주었다.

“자아, 이제 형양성으로 가자. 이틀 뒤 계포가 이끄는 우리 본진이 이르면 우리는 가려 뽑은 군사만으로도 5만이 넘는다. 밥이나 얻어먹자고 따라나선 유민(流民)들로 급하게 얽은 한왕 유방의 잡병 10만과 비할 바 아니다. 먼저 형양성을 쳐서 주가와 종공을 죽이고, 다시 성고성을 에워싸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앉은 유방을 사로잡자.”

그리고 종리매의 군사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넉넉히 내어 기운을 돋워주었다.

장졸들에게 그날 남은 해와 온 밤을 푹 쉬게 한 패왕은 다음날 일찍 종리매를 앞세우고 형양으로 달려갔다. 백리 남짓 되는 길이라 뜨거운 한낮은 군사들을 그늘에서 쉬게 하고도 그 이튿날 새벽에는 형양성에 이를 수 있었다. 그들을 본 성안 군민(軍民)들이 놀라 성문을 닫아걸고 싸움 채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패왕은 서둘지 않았다.

“조용히 성을 에워싸고 물 샐 틈 없이 지키기만 하라. 특히 유성마(流星馬)나 탐마(探馬)의 드나듦을 엄히 막아 성고의 유방이 우리가 여기 이른 줄 모르게 해야 한다. 그러다가 우리 본진이 이르면 이번에는 5만 대군을 한꺼번에 쏟아 부어 한 싸움으로 형양성을 우려 빼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그답지 않게 느긋이 계포가 이끄는 본진이 이르기를 기다렸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