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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칼럼]6·25때 먼저 가신 이들에게

입력 | 2005-06-23 03:02:00


구제(舊制) 중학교 5학년(현재의 고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전 지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좌익’으로 몰린 사람이나, ‘우익’으로 몰린 사람이나 참으로 억울하게,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피에 주린 ‘조국통일전쟁’이 3년 남짓 끌었으나 통일도 이루지 못한 채 전쟁은 거의 시작했던 그 자리에서 휴전이 됐다. 그것은 이념대립, 동족전쟁이라는 소름끼칠 싸움의 어리석음을 좌우간에 반성해 볼 기회였다. ‘북진통일’, ‘남반부 해방’의 허장성세가 요란했던 1950년대가 지나가자 남쪽에서는 ‘선 건설, 후 통일’이라는 실용주의 노선이 무익한 전쟁을 체험하고 살아남은 세대에 의해서 수용되었고, 그 선택은 이내 ‘한강의 기적’을 낳았다.

내일모레면 그 전쟁의 55주년이다. 그러나 올해에도 지난 2000년의 50주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6·25는 6·15에 묻혀지려 하고 있다. 나라와 나라님은 나라의 가장 큰 제사를 외면하고 있으나 그 전쟁에 가족 친지를 잃은 일반 서민들은 그렇게 모른 체 할 수만은 없다.

6·25를 살아남은 사람으로 난리 속에 먼저 가신 이들과 저승에서 만나게 될 날도 머지않으니 그이들에게 보고할 얘기를 요즈음은 가끔 생각해 본다.

가장 먼저 하고픈 얘기는 우리가 남북으로 갈라져 ‘대리전쟁’을 치렀던 동서의 이념전쟁은 세계적으론 20세기 말에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완전 패배로 끝장났다는 대역사다.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무승부로 끝나서 두 체제가 공존하고는 있다. 그러나 오늘의 북쪽은 주민에게 배급할 식량을 전 세계에 구걸하고 있으며 농사지을 비료마저 남쪽에 지원 요청하고 있다.

만일 6·25 때 가신 이들이 하늘에서 한반도를 굽어본다면 남북을 혼동하기 쉬울 거란 얘기도 꼭 할 생각이다. 광복 직후엔 북에 일제가 건설한 수풍발전소가 있어 남도 그 전력을 얻어 썼다. 그러다 남한에 정부가 수립될 무렵부터 북은 단전을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 옛날 호롱불을 꺼내 켜서 어둠을 쫓았던 사실을 6·25의 직전 또는 전중(戰中)에 먼저 가신 이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밤하늘에서 한반도를 내려다보면 북쪽은 문자 그대로 어둠의 세계요, 남쪽은 우선 물리적인 차원에서 광명 천지란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족 전쟁에 희생된 이는 우익만이 아니라 좌익에도 숱하게 있었다. 그것이 조국통일의 제단에 바치는 희생이라 믿고 낙동강 공방전에서 20세 전후의 꽃 같은 목숨을 바친 숱한 인민군 병사들. 시신이 어디 있으며 그 자리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낯선 남녘 땅에 묻힌 북의 무수한 젊은이들. 그 귀중한 목숨의 희생으로 북녘의 ‘조국’은 무엇을 얻은 것일까.

그들에게는 그래도 그들이 목숨을 바친 ‘조국’이라도 있다. 더욱 억울하고 불쌍한 것은 남쪽의 좌익이다. 고향도 가족도 다 버리고 구사일생으로 쫓기듯 월북하여 ‘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했던 남로당 사람들. 남과 북, 좌와 우 사이에서 아무것도 누린 것 없이 고생만 했던 이들 남로당 사람들은 휴전 1주일 후엔 그들의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란 누명으로 처형되고 만다. 북도 남도 버린, 이 ‘조국’ 없는 원혼(寃魂)을 저승에서 만나면 무슨 말로 위로를 해 줄 수 있을까. 아직도 한반도엔 스탈린주의의 세습 독재체제가 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내가 이승에서 10년을 더 살고 간다면 아마 그때쯤엔 남로당 간부를 숙청한 독재자도 몰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그들을 다소나마 위로해 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은 그래도 해 줄 수 있겠다. 이제는 북이 식량만이 아니라 ‘체제유지’조차 미국에 구걸하고 있다고. 그러면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등 ‘절세의 영웅’ ‘불멸의 지도자’들이 다발로 주검이 되어 오는 저승에 계신 이들은 이미 눈치를 챌 것이다. 천하의 갑부도 3대를 못 가는데 3대를 간 독재자는 없는 법이라는 것을….

그리고 6·25 때 희생된 남로당 사람들에게는 얘기해 줘야겠다. 좌익이라 해도 이젠 북에서는 박해를 받을지 몰라도 남에선 그럴 걱정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최정호 객원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