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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五.밀물과 썰물

입력 | 2005-04-01 19:29:00

그림 박순철


“수수(휴水)를 잊었느냐? 깊은 물을 등지고서도 달아나 살아 보려 하다가 우리 군사 10여만의 시체가 수수의 물 흐름을 막았다!”

이 말을 듣자 지난번 수수싸움에서 어렵게 살아나온 병졸들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때도 한신의 말을 따라 되돌아서서 싸운 이들은 겨우 길을 앗아 살아날 수 있었지만, 달아나려고만 하던 이들은 모두 초나라 군사들의 창칼에 죽거나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렇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싸우다 죽자!”

“모두 돌아서라! 대장군을 따르면 살길이 있다. 모두 죽기로 싸워 살길을 앗자!”

지난번 수수싸움을 겪은 군사들이 먼저 절망을 결사의 전의(戰意)로 전환시켜 그렇게 외치며 돌아섰다. 그러자 그 결사의 전의는 빨리 번지는 열병처럼 다른 한나라 장졸들에게도 번져 갔다. 한신이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큰소리로 그들의 기세를 북돋우었다.

“잊지 말라! 우리가 이리로 온 것은 싸움에 져서가 아니다. 보다 적을 쳐부수기 좋은 곳으로 유인했을 뿐이다. 적이 대군이라고 하나 조련 안 된 갈까마귀 떼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쯤 적의 진채는 간밤에 미리 떠난 우리 군사들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세차게 밀어붙이면 적은 그대로 사태 지듯 무너져 내리고 만다!”

장수들이 그 말을 받아 아직도 겁에 질려 있는 병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되뇌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는 심경으로, 달리 길이 없는 그 병졸들도 마침내는 한신의 말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생존을 향한 처절한 갈망을 결사의 전의로 바꾸어 되돌아선 한군 3만은 거대한 불덩이처럼 맞받아쳤다.

그때까지 승리의 환상에 젖어 기세 좋게 달려오던 조군 선두는 한군의 그 맹렬한 되받아치기에 영문도 모르고 산산조각이 났다. 이어 달려온 진여(陳餘)의 본대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들이 어떤 절망적인 용기, 어떤 치열한 열정과 맞닥뜨렸는지 알지도 못하고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승상이 직접 이끌고 있는 조군(趙軍) 본대가 그 꼴이 나니 뒤따라오던 후진(後陣)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오래잖아 본대가 창칼을 끌고 쫓겨오자 후진은 한번 싸워 보려고도 않고 앞장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한군이 불같은 기세로 그런 조군을 뒤쫓았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조군의 전력(戰力)은 크게 상한 것이 아니었다. 몇만은 한신의 배수진에 당해 죽거나 항복했지만, 그래도 잔군(殘軍)을 수습하기만 하면 아직 한군의 다섯 배는 넘었다. 그걸 믿었는지, 한식경이나 달아나서야 겨우 제 정신을 차린 진여가 문득 장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싸우는 이에게 늘 있는 일이다(승패병가상사·勝敗兵家常事). 이번에는 적의 꾀에 빠져 한 싸움을 내주었지만, 우리가 아주 진 것은 아니다. 어서 진채로 돌아가 병마를 정돈한 뒤에 다시 싸워 보자. 반드시 한신을 사로잡아 이 욕됨을 씻자!”

그리고는 군사를 몰아 정형(井형) 읍성(邑城) 밖의 진채로 돌아갔다.

오래잖아 저만치 조군의 진채가 보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진채 누벽(壘壁) 여기저기에 높이 꽂혀 펄럭이는 것은 한군의 붉은 깃발들이 아닌가. 거기다가 더욱 진여의 눈을 뒤집히게 하는 것은 누벽에 올라서 있는 수많은 한군의 빈정대는 듯한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