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 금융계의 큰 관심사는 국제자본시장의 불안정한 균형상태다. 미국 달러화 약세가 3년 넘게 지속되면서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의 ‘공생(共生)관계’가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외환보유액을 미 달러표시 자산으로 갖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은 ‘약(弱)달러 함정’에 빠졌다. 홍익대 무역학과 박원암 교수는 “새로운 균형상태로 가기 위해서는 각국이 고통을 나눠 가져야 하는데 이에 대한 합의가 쉽지 않다”며 “이 과정에서 급격한 환율변동이 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통화당국은 물론 기업도 환(換)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시아 국가의 딜레마=작년 말 기준으로 중국,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태국, 인도 등 아시아 8개국(홍콩 포함)의 외환보유액은 총 2조4000억 달러. 이 가운데 1조6800억 달러가량이 달러화 표시 자산이다.
아시아 각국이 막대한 달러 자산을 보유한 것은 자국 통화가치가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직간접적인 환율시장 개입으로 달러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외환보유액으로 미 재무부 채권을 사들였다.
이런 ‘달러의 순환’으로 아시아 국가는 수출 확대로 경제성장을 하고 미국은 남의 나라 돈으로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 등 쌍둥이 적자를 메우는 공생 관계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달러 약세가 2002년 2월 이후 3년 넘게 지속되면서 공생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시아 각국은 달러가치가 떨어지면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또 달러를 사들이기 위해 발행한 국내 채권과 미국 국채의 금리차까지 커지면서 이중의 손해를 입고 있다.
반면 미국은 쌍둥이 적자를 줄여 달러화 가치를 회복하려는 노력 대신 달러약세를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 입장에서 외국이 갖고 있는 달러는 부채다. 따라서 달러가치가 떨어지면 미국은 손쉽게 부채를 줄일 수 있다.
그렇다고 아시아 각국은 달러를 함부로 팔 수 없다. 삼성경제연구소 김한수 수석연구원은 “각국이 달러를 내다팔면 달러가치가 더욱 떨어지고 이는 미국 채권시장의 붕괴로 이어져 세계경제 전체가 침체에 빠져 모두가 손해를 본다”며 “현 상황은 ‘공멸(共滅)의 공포로 인한 균형’ 상태”라고 말했다.
▽중국과 미국의 힘겨루기=미 뉴욕주립대 노리엘 루비니 교수는 1월 25일 자신의 누리사랑방(블로그)에 현 상태를 “미국과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과의 비(非)협력적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공(先攻)은 미국이 했다. 재정적자를 줄이려는 노력 없이 달러약세를 방치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국제금융시스템의 파괴를 감수하면서 달러를 팔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이 위안화를 평가절상하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동반 절상하기를 원하고 있다. 달러 약세를 통한 미국의 부채감소를 유도한 것.
그러나 중국은 발전 속도 둔화와 위안화 절상을 노리고 들어온 2000억 달러에 이르는 투기자금이 막대한 이득을 남기고 일시에 빠져나갈 것을 우려해 평가절상을 미루고 있다.
미국에 대한 반격도 나타나고 있다. 중국, 한국 등이 외환보유액 중 유로화나 엔화 등 다른 통화 비중을 늘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아직은 경고 수준이지만 국제금융계에서는 아시아 국가 중앙은행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국제금융계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국제적인 합의가 곧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박승 한은 총재도 최근 국회에서 “1985년 플라자 합의와 비슷한 합의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아직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미국의 재정적자를 축소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병기 기자 eye@donga.com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