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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김성근]누가 기초과학을 이끌어 줄까

입력 | 2004-11-26 18:02:00


어디서 본 영어 표현 중에 “‘모두가’ 반드시 ‘누군가’는 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면 도로에 빈 종이박스 몇 개가 나뒹굴어 지나는 모든 차들이 이를 황급히 피하느라 진땀을 빼면서도 정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차를 세우고 이를 치우려고 하지 않는 경우 같은 것이다. 위험하고 귀찮지만 나보다 덜 바쁜 그 ‘어느 누구’가 곧 차에서 내려서 그 박스들을 치울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회의 저력과 역동성은 이러한 ‘어느 누구’가 얼마나 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생각은 누구나 한다.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 국민 모두가 ‘기초과학’이 중요하다고 한다. 당장 눈앞의 응용기술만 좇다가는 영원히 2류 국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똑똑한 학생들이 의대나 법대로 가기보다는 수학과 과학을 해야 한다고 열을 올린다. 이공계 기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히 그중에서도 열악한 기초과학을 위해 국가예산도 대폭 늘려야 한다고들 말한다. 문제는 이런 ‘거룩한’ 얘기에 누구나 동의하지만 아무도 실천의지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굳이 정부만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나는 평소에 우리 국민이 툭하면 모든 문제를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돌리는 고약한 습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시민사회의 개별 구성원들을 탓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도로의 빈 박스를 치우는 문제는 양심적 소수가 하면 된다. 그러나 질주하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고장이 나서 털털거리는 유조차를 끌어 주는 문제라면 견인차가 해야 할 일이다.

불행히도 대한민국이라는 번잡한 도로에서 기초과학이라는 소외받고 고장난 유조차를 제대로 끌 수 있는 견인차는 단 한 대밖에 없다. 건국 후 지난 반세기의 경험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기초과학 육성은 국정 최고책임자의 몫이다.

돈 벌기에 바쁜 기업이 여기에 투자할 리 없고, 단기간 실적 쌓기에 급급한 정부 부처들이 여기에 우선순위를 둘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전체의 연구개발비가 18조원이고 그 중 정부 지출분만도 6조원인데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개발비는 3000억원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웬만한 도로나 교량 하나 세우는 돈도 안 되는 예산으로 우리는 대한민국의 미래 보험을 들려고 하는 셈이다.

대통령이라는 견인차가 다른 일로 바빠서 고장난 유조차를 챙기지 않으면 필시 유조차는 길 밖으로 치워지게 될 것이다. 질주하던 자동차들은 연료가 바닥나 길가에 서게 되면 덜덜거리며 쫓아오던 그 유조차가 어디 있는지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왜 그동안 그 ‘어느 누군가’가 유조차를 챙기지 않았는지 서로 비난할 것이다.

냉엄한 세계질서 아래에서 남의 유조차에 도움을 청할 수 없고, 오던 길을 거꾸로 갈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도로에 멈추어 서서 유조차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늦게라도 온다면 말이다.

고장난 차와 빈 박스가 나뒹구는 2004년 초겨울, 주인 없는 대한민국이라는 스산한 도로에 서서 과연 우리에게 그 ‘누군가’가 있는지 아니면 ‘아무도’ 없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견인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올 날은 언제인가.

김성근 서울대 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