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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입력 | 2004-07-26 18:38:00

그림 박순철


대장군 韓信(13)

“번(樊) 장군께서 연일 술에 취하여 군사들을 모질게 몰아대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게으르고 느리다며 매질인데, 심하면 죽이기까지 하니, 그러잖아도 불평 많던 군사들은 벌써부터 떼를 지어 달아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길 떠난 지 닷새밖에 안 됐는데 머릿수가 이미 100이 넘게 줄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식(蝕)골짜기에 이르기도 전에 잔도(棧道)를 닦을 군사가 하나도 남지 않겠습니다.”

그 말로 미루어 번쾌는 뒤틀린 심사를 군사들에게 풀고 있는 듯했다. 한왕도 따로 소식을 듣는 데가 있는지, 오래잖아 그 일을 들어 알았다. 그날로 한신을 불러들여 걱정했다.

“원래도 그 머릿수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인데 군사들까지 달아난다니 큰일이외다. 번쾌가 마침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실로 걱정이오.”

그제야 한신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새삼 한왕에게 빌듯이 말했다.

“장함을 속이기 위해 번 장군을 격동시키려 하다보니 대왕까지 속이게 되었습니다. 군사를 부리는 데는 속임수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지만(兵不厭詐), 남의 신하되어 임금을 속이는 죄 또한 작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은 이번에 번 장군을 짐짓 몰아댄 것은 성난 번 장군이 더 모질게 군사들을 몰아대 더 많은 우리 군사가 장함 쪽으로 달아나도록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장함의 이목을 잔도 쪽에 잡아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이제 아무 염려 마시고 다시 노약한 군사 500명만 더 잔도 쪽으로 보내 주십시오. 번장군의 매질을 못 견뎌 달아난 우리 군사들은 반드시 장함의 군사들을 찾아갈 것인데, 그때도 잔도를 닦는 우리 군사들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동쪽으로 나가는 길은 잔도밖에 없음을 적이 믿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한왕도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이름 없는 부장(部將) 하나를 뽑아 노약한 군사 500명을 주며 번쾌를 뒤따라가게 했다.

“이제 고도(古道)로는 언제 군사를 낼 것이오?”

잔도를 닦으러 가는 두 번째 군사들을 보낸 날 한왕은 다음 일이 궁금하다는 듯 한신에게 은근히 물었다. 한신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번 장군이 군사를 모두 잃고 기일을 넘겨 죄를 빌러 올 때쯤이 좋겠습니다. 다만 그전에 먼저 해두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첫째는 병력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장구한 계책입니다. 이제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나가게 되면 짧아도 몇 년은 길고 힘든 싸움을 치러야 합니다. 옛날같이 유민들을 긁어모아 되는 대로 먹고 입히며 오직 함양(咸陽)만 바라보고 밀고나가는 그런 마구잡이 싸움이 아닙니다. 각기 봉지(封地)를 근거로 병력과 물자를 수급 받아 이곳저곳에서 세력을 다투면서, 한 발 한 발 천하의 대세를 결정해가는 나라들 사이의 길고 소모적인 전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싸움으로 비어버린 머릿수와 필요한 물자를 제때에 채우지 못하면 천하쟁패는 영 글러지고 맙니다.”

“군사들의 머릿수를 헤아려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라면 소(蕭)승상이 잘 해나가고 있소. 앞으로도 승상에게 맡기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