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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한기흥/북핵문제 ‘잃어버린 10년’

입력 | 2004-06-27 18:50:00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 벅찬 디지털시대엔 진부하게 들린다. 세상사에서 ‘스피드’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는 요즘 10년이 넘게 안 풀리는 분규가 있다면 당사자들의 해결 의지를 한 번쯤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북한핵문제가 바로 그렇다. 26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끝난 3차 6자회담에선 한반도 비핵화의 첫 단계로 북한이 핵을 동결하는 대신 회담 참가국들이 보상한다는 원칙에 의견이 모아졌다.

이미 오래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이다. 모든 것을 쉽게 잊는 기억력을 탓하며 시간을 되짚어가면 1차 북핵 위기가 최고조로 치달았던 94년 6월의 숨 막히던 상황이 다시 떠오른다.

미국의 CNN방송 등 외신은 연일 서울발로 한반도 위기를 보도했고, 시민들은 생필품 사재기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미국이 전면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영변 핵시설 폭격을 심각히 검토했던 사실을 당시 한국인들은 까맣게 몰랐다.

당시 한반도의 짙은 전운이 걷힌 데는 6월 15일부터 나흘간 평양을 전격 방문, 김일성(金日成) 주석과의 회동을 통해 북-미 대화의 물꼬를 튼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큰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7월 8일 김 주석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한반도 정세가 다시 요동치는 상황에서 북-미가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신 경수로를 건설하는 제네바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그해 10월이었다. 그러나 이는 2002년 10월 북한이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을 시인함에 따라 사문화됐다. 요즘 북핵 문제의 새 해법을 찾는 6자회담이 진행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지난 10년간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북한의 핵능력에 대한 의혹은 ‘핵무기 1, 2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확보 가능성’에서 ‘여러 개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으로 바뀌었다. 반면 한미동맹은 북핵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로 크게 악화됐고, 북핵문제의 장기화에 따른 안보불감증이 우려되기에 이르렀다.

북핵문제가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북한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 철저하게 불신하고 직접 대화를 거부하는 미국의 태도 역시 바람직하다곤 보기 어렵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못지않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인권을 강조하는 카터 전 대통령은 96년 출간한 ‘살아있는 신앙(Living Faith)’에서 자신의 방북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때로 나는 우리가 ‘악’으로 규정한 지도자들이 평화를 위해 우리와 진지한 대화를 할 용의가 있음을 발견한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그런 사람이었다…94년 그를 만날 땐 걱정과 불안이 있었지만 나는 그가 핵위기를 끝내고 미국과 유익한 대화를 하고 싶어함을 알게 됐다.”

북핵문제의 ‘잃어버린 10년’을 벌충하는 가장 빠른 길은 역시 북-미가 머리를 맞대고 협상을 벌이는 일이다. 양측이 속내를 다 털어놓고 해법을 찾지 않으면 북핵문제는 다시 1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미제(未濟)’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한기흥 정치부 차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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