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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다시보자]고구려사 쟁점들…(1)건국시기

입력 | 2004-04-05 17:43:00

중국 지린성 지안 산성하고분군(山城下古墳群)은 고구려 초기의 고유한 무덤양식인 적석묘(돌무지무덤)가 무더기로 발견된 곳이다. 이 적석묘들에는 수 백년에 걸친 고구려인들의 건국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제공 여호규 교수


《고구려 역사는 많은 부분이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고구려의 건국은 언제인가, 비련의 주인공 낙랑공주가 살았던 낙랑은 어디에 있었는가,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은 과연 가능했을까, 광개토왕릉비는 조작됐는가…. 시리즈 3부에서는 지난달 정식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과 공동기획으로 이 같은 미스터리를 둘러싼 역사학계의 논쟁을 소개한다. 각 논쟁에서 드러나는 역사해석의 차이는 무엇이며 논쟁의 종결을 위해 연구해야 할 과제들은 어떤 것인지 짚어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구려가 기원 전 37년에 건국되었다고 전한다. 668년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멸망됐으니 705년간 존속한 셈이다. 고려나 조선왕조가 500여 년 간 이어졌고, 중국왕조들이 300년 이상 지속된 경우가 드문 사실을 상기하면 장수한 셈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800여년 또는 900여년 간 존속했다는 전승이 있다. 신라 문무왕이 고구려 왕족 안승을 책봉한 글에 고구려가 800년 만에 멸망했다고 하며, ‘당회요(唐會要)’라는 중국 역사책에는 고구려가 900여년 존속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800년 아니 900여년이라. 그렇다면 고구려는 기원전 3∼기원전 2세기에 건국된 셈이다. 고조선과 같은 시기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했다니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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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학계의 기원전 3세기 건국설

북한학계는 최근 고구려가 기원전 3세기에 건국되었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근거는 이렇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이 대주류왕(또는 시조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적힌 반면, ‘삼국사기’에는 11세손으로 나온다. 양자를 액면 그대로 비교하면 ‘삼국사기’에는 초기 왕이 여러 명 생략됐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위서(魏書)’에는 주몽 다음에 여달(閭達), 여율(如栗), 막래(莫來) 등 ‘삼국사기’에는 없는 왕이 여러 명 등장한다.

이에 북한학계는 고구려 초기에 5명의 왕이 더 존재했다고 보고, 각 왕의 재위기간을 40∼50년으로 상정해 기원전 277년에 건국되었다고 설정했다. 위의 자료만 놓고 본다면 상정해 볼 만한 학설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700여 년 간 존속했다는 이야기는 고구려 패망 직후에 이미 존재했다. 가령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고구려가 700년 만에 멸망했다고 기술돼 있고, 중국 뤄양(洛陽)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민 고자(高慈)의 묘지명에는 고구려가 708년간 존속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의 705년과 불과 3년 차이다.

그런 만큼 ‘삼국사기’의 건국 연대는 김부식의 창작이 아니라 고구려 시기의 기록을 근거로 기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광개토왕이 대주류왕의 17세손이라는 ‘광개토왕릉비’ 기록도 왕의 대수로 해석한다면 ‘삼국사기’와 일치한다(왕 대수로 대주류왕은 3대왕, 광개토왕은 19대왕). 더욱이 ‘광개토왕릉비’의 시조 추모왕, 2대 유류왕, 3대 대주류왕은 각기 ‘삼국사기’의 동명성왕(주몽), 유리명왕, 대무신왕에 해당한다.

따라서 414년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할 무렵, 이미 ‘삼국사기’와 같은 왕계와 건국설화가 성립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고구려 건국연대도 ‘삼국사기’가 사실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고구려가 800년이나 900여년 존속했다는 기록은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할까?

중국 지린성 환런(桓仁)에 위치한 오녀산성(五女山城). 해발 820m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새지로 고구려 첫 번째 도읍지인 흘승골성(訖升骨城)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 여호규 교수

●건국 신비화에 가려진 역사

‘광개토왕릉비’나 ‘삼국사기’의 건국설화를 보면, 시조 추모왕(주몽)은 하느님(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외손으로서 온갖 곤경을 이겨내며 부여에서 남하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한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하늘과 물로부터 부여받은 신이한 능력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것이다.

시조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건국설화는 다른 고대국가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당시에는 시조의 신성성이 왕실의 존엄성으로 연결됐고, 이는 국가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고대 건국설화에서는 흔히 신이한 능력을 가진 시조가 혼자 힘으로 나라를 세운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다보니 실제 건국과정은 대부분 생략될 수밖에 없다.

압록강 중류 일대의 주민집단은 이미 기원전 3∼기원전 2세기부터 철제농기구를 사용해 농사를 지으며 적석묘(돌무지무덤)라는 독특한 무덤을 축조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예맥사회와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정치적으로도 성장해 ‘구려(句麗)’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한(漢)나라가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을 설치했지만, 이 지역 주민집단에 의해 기원전 75년 압록강 서북방면으로 쫓겨났다. 그 뒤 여러 정치세력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이 무렵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했다. 주몽집단은 선진문화를 바탕으로 토착세력과 연합해 세력을 키운 다음, 다른 정치세력을 통합하고 현도군의 영향력도 완전히 물리쳤다.

이로써 압록강 중류 일대 전체를 다스리는 고구려가 건국되었다. ‘광개토왕릉비’나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고구려 건국 시기는 바로 이때다. 그렇지만 이는 최후 승자인 주몽집단에 의해 고구려 건국이 완성된 시점일 뿐이다. 건국을 향한 움직임은 주몽이 남하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실제 중국사서 ‘삼국지(三國志)’에는 주몽이 세운 계루부 왕실 이전에 왕 노릇을 했던 소노부 집단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도 주몽보다 앞선 맹주로 비류국 송양왕이란 인물이 전해진다.

더욱이 압록강 중류 주민집단 전체를 놓고 본다면, 고구려 건국은 기원전 3∼기원전 2세기경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가 800여년 또는 900여년 존속했다는 전승은 새롭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시조의 신성성만 강조하는 건국설화를 뛰어넘어 오랜 세월 무수한 사람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고구려 건국과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

▼고구려-주몽의 어원▼

국호 고구려(高句麗)는 구려(句麗)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고(高)’라는 미칭(美稱)이 더해져 국호로 정해졌다. ‘구려’는 계곡에 자리 잡은 마을이나 성곽을 뜻하는 ‘구루’를 한자어로 옮긴 말로 보인다.

구려라는 명칭은 고구려인들이 계곡 사이로 펼쳐진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성을 쌓아 적을 방어하며 살아가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고구려라는 국호는 압록강 중류 일대의 자연환경과 고구려인의 삶의 모습을 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조 주몽(朱蒙)은 추모(鄒牟), 중모(仲牟) 등으로도 불렸다. 발음이 비슷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모두 같은 말을 달리 표기한 것이다. 주몽은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컫는 부여의 말이다. 시조 주몽이 출중한 무예를 지녔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이름일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주몽이 부여에서 예씨(禮氏)와 결혼한 사실만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부여에서 남하한 다음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됐다가 그 뒤를 이어 왕이 됐다고 한다.

또한 백제본기 세주에는 소서노(召西奴)라는 여인과 결혼해 그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나온다. 이러한 전승은 주몽이 압록강 중류의 토착세력과 결합해 힘을 키웠음을 잘 보여준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