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계단’
한밤의 텅빈 놀이 공원. 이곳 사장(권상우)의 데이트를 위해 회전목마가 돌아간다. 정서(최지우)가 ‘무엇을 사려 오셨어요’라고 묻자 사장은 ‘별은 내 가슴에’의 차인표처럼 손가락으로 ‘당신’하고 가리킨다…. (‘천국의 계단’)
SBS가 최근 ‘천국의 계단’ ‘발리에서 생긴 일’로 시청률 상승중이다. ‘천국의 계단’(극본 박혜경·연출 이장수)은 새해 첫주 시청률 41.3%를 기록했고, 3일 첫 방송한 ‘발리에서 …’(극본 김기호·연출 최문석)는 방영 2회만에 시청률 20%대에 올라섰다.
두 드라마는 지난해 MBC ‘다모’ ‘대장금’ 등에 밀렸던 SBS가 전력을 쏟은 작품. 호화 캐스팅과 젊은 층의 기호를 겨냥한 소재 등으로 일단 시청률 회복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관심만큼 두 드라마의 문제에 대한 지적도 적지 않다.
‘발리에서 생긴 일’
▽어디서 본듯한 소재?=‘천국의 계단’은 주인공의 교통 사고와 기억상실증, 실명(‘겨울연가’), 이복 남매간 사랑(‘가을동화’), 계모와 콩쥐팥쥐(‘유리구두’ ‘신데렐라’) 등 인기 드라마의 자극적 소재들을 버무렸다. 특히 최지우를 비련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시도는 거의 가학에 가까울 정도다. 어릴 때 계모에게 갖은 구박을 받다가,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안암(眼癌)에 걸려 실명하고 죽음을 맞는다.
두 드라마는 각각 놀이공원(천국의 계단)과 인도네시아 발리(발리에서 생긴 일)라고 하는 파라다이스 공간에 사는 재벌 2세가 주인공으로, 그가 불우한 여주인공을 사랑한다는 고전적 ‘신데렐라’ 이야기가 반복된다. ‘천국의 계단’에서 최지우와 신현준이 함께 죽음을 맞고, ‘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이 권총자살을 한다는 결말도 자극적이다.
▽‘옥의 티’ 찾기 놀이=‘천국에 계단’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옥의 티’ 찾기가 유행할만큼 앞뒤 안맞는 설정이 많다. 탄 자국이 없는 정서의 지갑을 불에 탄 시체에 집어넣어 신원을 바꾸고, 5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드라마 ‘대원군’을 찍고 있는 탤런트인 계모(이휘향) 등.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자고 갈래?”(조인성) “얼마 줄건데”(하지원) 하는 선정적 대사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런데 왜 보나=불안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시청자들의 모순된 시청 행태 덕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시청자들은 비현실적 상황을 계속 보면서 인과관계나 개연성을 따지기 보다 오히려 묘한 판타지를 느낀다는 것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드라마를 집단적으로 즐기는 행태가 나타난다.
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현실이 갑갑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환상’을 좇는 한국드라마는 스토리가 엉성하더라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힐링’(healing) 상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