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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방형남칼럼]용서하세요

입력 | 2003-12-24 18:51:00


스페인의 올 크리스마스 최대 뉴스는 18억유로(약 2조7000억원)의 당첨금이 걸린 크리스마스 복권이다. 4000만명의 스페인 국민 가운데 3000만명이 아기 예수의 축복을 기대하며 복권을 샀다. 사흘 전 행운의 숫자 42473을 맞힌 1등 당첨자 1900명에게 3억8000만유로의 돈벼락이 떨어졌다. 20만유로(약 3억원)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크리스마스 시즌 내내 1등 당첨자 모두의 입에서 감사기도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돈벼락이 최고의 축복? ▼

미국이 종교의 자유가 없는 5개 ‘특별관심대상국’으로 분류한 중국에도 크리스마스는 있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크리스마스 용품 및 선물 수출국이다. 숨어서 은밀하게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대부분의 가톨릭 및 개신교 신자들보다 크리스마스 덕분에 수억달러를 벌어들인 비신자(非信者) 중국인들이 더 기쁨에 겨워 흥청댄다.

스페인과 중국의 크리스마스는 돈 냄새가 나는 세속적인 모델의 전형이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도 점점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지만 그들에 비할 것은 아니다.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뜻을 되새겨 모든 갈등과 불화가 종식되고 종교와 지역, 인종과 이념을 떠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는 요지의 성탄 축하 메시지를 발표했다. 조계종 총무원은 ‘아기 예수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까지 내걸었다.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을 돕기 위해 구세군 냄비 앞에서 모금을 하고 있는 스님들도 있다.

올 부처님 오신 날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백도웅 총무가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했고, 부처님께서도 마음은 모든 진리의 원천이라고 하셨다”며 “깨끗하고 평화로운 종교인의 심성으로 이 시대에 희망의 표지가 되도록 협력하자”는 내용의 축하 메시지를 조계종에 보냈다.

한국 종교계의 주고받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따지고 보면 한국은 그렇게 행동할 만한 요건을 갖춘 나라다. 문화관광부 통계(1995년 인구센서스 기준)에 따르면 불교 신자 1032만명, 개신교 신자 876만명, 천주교 신자 295만명 등 2259만명이 종교를 갖고 있다. 전체 인구 4455만명의 절반이 사랑과 자비와 평화의 종교를 신봉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종교는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가. 우리는 고백성사, 희생양, 십자가를 진다 등 종교 용어를 무시로 사용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결단을 내린다는 흔한 표현도 예삿말이 아니다. 본래의 의미를 떠올리면 함부로 쓴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종교를 걸어 절실한 심정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가상한가. “십자가를 지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한번쯤은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고초를 생각할 것이다.

▼한국 신앙인 반성해야 ▼

그런 우리들이 올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가. 대통령이 나라를 망친다, 정부가 잘못했다, 국회의원은 썩었다, 경영 잘못한 기업인이 책임져야 한다…. 끊임없이 ‘네 탓’을 하며 살아왔다. 셰익스피어는 “나쁜 소식은 그 소식을 전달하는 사람에게도 전염된다”고 했다던데 언론도 ‘네 탓 소식’ 전하기에 바빴다.

우리가 그토록 불행한가. 올해 전 세계에서 300만명이 에이즈로 숨졌다. 1억2100만명의 어린이가 학교에 못 간다. 어린이 노동인구가 2억4600만명이나 된다. 세계 인구 63억명의 절반인 30억명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연명한다. 그런 불행의 카테고리에 한국은 들어가지 않는다.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국민 절반이 마음을 돌리면 다른 세상이 될 수 있다. 신앙인들이 용서하고 반성하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오늘은 아기 예수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오신 날이다. 순간순간이 아니라 영원을 위해, 이승이 아니라 내세를 바라보며 사는 한국인들에게 한 차례 용서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용서합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합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