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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열반 청화스님]40여년간 一日一食 - 장좌불와

입력 | 2003-11-13 18:38:00

‘눕지 않고 수행하는’ 장좌불와를 40여년간 지켜온 청화 스님이 전남 곡성군 성륜사에서 좌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 현대불교신문


12일 열반한 청화 스님은 불교계에서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받는 대표적 선승(禪僧)이었다. 그는 늘 출가자의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의 자세를 보여줬다.

그는 평소 “계율을 지켜야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제대로 삼매(三昧)에 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꺼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무애(無碍)행을 핑계로 계율을 어기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그는 또 신도가 찾아와 절을 하면 맞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으면 같이 무릎을 꿇는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70세가 넘어서도 시자의 도움 없이 손수 불 피우고 빨래하고 음식 만들고 청소하는 솔선수범의 면모를 보였다.

스님은 출가 후 주지를 한 번도 맡지 않고 지리산 상무주암 백장암, 두륜산 상원암 진불암, 남해 보리암, 월출산 상견성암 등 20여 곳을 옮겨 다니며 수행했다. ‘얽매여서는 안 된다’며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다른 스님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주로 토굴 생활을 한 그는 은사인 금타 스님의 수행법을 좇아 40여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일일일식(一日一食)을 꾸준히 지켰다.

그는 “토굴에 살다 보면 자연히 하루 한 끼만 먹는 것과 눕지 않는 것이 몸에 편하게 느껴지게 된다”고 말했다.

1960년대 전남 해남 두륜산에서 수행할 때는 손수 등짐을 져 나르면서 진불암을 증축했는데 오르막길에서 마치 축지법을 쓰듯 빨리 걸어가 20대 행자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은둔 생활을 하던 그가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1985년.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으나 6·25전쟁 때 폐허가 된 전남 곡성 태안사 중창에 나섰을 때다. 당시 스님은 20여명의 도반(道伴)과 3년간 산문(山門) 밖으로 나오지 않고 묵언정진하면서 쇠락한 선문(禪門)을 다시 일으켰다.

그는 문중 중심으로 움직이는 조계종 내에서 한 문중에 소속되지 않은 독특한 존재였다. 또 불교 내 교파나 교리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 원통(圓通) 불법을 주창했다. 조계종이 근간으로 삼는 화두 참선 위주의 간화선(看話禪) 외에도 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염불선으로도 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님은 해외포교에도 힘써 1995년부터 3년간 미국 캘리포니아 캐멀과 팜스프링스에 삼보사와 금강선원을 세워 한국 불교를 미국 사회에 알렸다.

지난해 가을 강원 횡성 토굴에서 정진하는 등 수행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열반에 들기 보름 전부터 “금생에 인연이 다했다”며 입적을 예견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원통불법의 요체’ ‘정통선의 향훈’ ‘가장 행복한 공부’ 등이 있다.

광주사범학교를 나와 일본 메이지(明治)대에서 유학한 그는 광복 직후 좌우대립 국면에서 갈등하다가 속가에 부인과 아들을 남겨두고 47년 출가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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