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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청계천 2003년 5월

입력 | 2003-05-22 16:36:00

서울 중구 장교동 한화빌딩(청계2가) 옥상에서 촬영한 청계고가도로. 청계2가부터 청계8가 삼일아파트까지가 멀리 보인다. 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출근길 육교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꽃과 물고기가 있는 청계천, 그 꿈이 이루어집니다

- 청계고가 철거 2003년 7월부터.’

서울 도심을 흐르는 청계천은 1958년부터 1978년까지 복개공사를 거쳐 콘크리트로 덮였다. 청계천에 대한 기억은 살아온 세월만큼 다르다.장년층은 불타는 판자촌 앞으로 흐르던 탁한 개울과 빨래터를 떠올린다. 그러나 아스팔트 청계천을 보고 자란 20, 30대에게 청계천은 낯선 공간일 수도 있다.

지상에서 8m 높게 솟아 있는 청계고가를 자동차로 지나면 대기업 사옥의 커다란 영문 로고와 야광 조명으로 번쩍이는 현대식 동대문 의류타운의 간판만이 눈에 잘 띈다.

청계천 복원사업은 현재 광교에서 청계9가 신답철교까지 이어지는 5.86km 길이의 청계고가를 뜯어내고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바로 앞부터 수심 30cm의 시내로 만드는 작업이다.

물길이 뚫리는 대신 현재 지상 8차선, 청계고가 4차선 등 모두 12차선인 찻길은 왕복 4차선으로 줄어든다. 복원공사로 물류의 어려움이 생기면 삶의 터전을 떠나야하는 것이 아닐까.

청계천 사람들은 한숨 쉰다.

도시 심장부의 현재 풍경이 언젠가는 과거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조바심에, 청계천에 삶의 토대를 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욕심에 13∼17일 도보로 청계천로를 따라갔다.

2003년 5월 천변 풍경 스케치는 그렇게 시작됐다.》

● 개발시대:

삼일빌딩(청계2가)→세운상가(청계4가)

광교를 지나 청계2가 삼일빌딩에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서부터 청계고가가 공중으로 둥실 떠오른다.

1971년 준공 당시 국내 최고층 건물(높이 114m, 31층)로 개발시대의 상징이었던 삼일빌딩과 그로부터 12년 후인 1983년 ‘봄’이란 뜻의 프랑스어 이름을 가진 쁘렝땅 백화점이 청계고가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인연이 새삼 새롭다. 독립만세를 외치던 3·1운동은 꽃피는 봄에 일어났다.

일제강점기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서 약방 지물포 물감집이 있던 광교 일대는 지금은 말끔한 오피스타운으로 변신해 있다. 그러나 삼일빌딩에서 네거리를 건너자마자 3평 남짓한 점포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청계 2, 3가 공구·베어링·소방 상가부터는 바야흐로 고가 밑 세상이다.

이름도 정겨운 ‘귀뚜라미’, ‘린나이’…. 그러나 공구상가 사람들은 기자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생존권 보장 없는 청계천 복원을 반대한다’는 플래카드와 차도에 어지럽게 주차된 화물트럭이 그들의 불안한 심정을 고스란히 내보인다.

무궁화 3개의 2급 호텔인 청계3가 센츄럴 관광호텔은 청계천이 복원되면 ‘개천 프리미엄’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1박에 8만원인 객실 70개 중 청계천을 향하는 방은 12개라 했다.

요즘 청계천 풍경을 사진에 포착해 두려는 대학생들이 부쩍 많다. 캐논 카메라를 든 서울예술대 사진과 장계민씨(23)는 청계3가 노점상의 얼굴을 찍겠다고 간곡히 사정했지만 얼굴이 까만 50대 노점상은 “대학생 딸이 보면 어떡하냐”며 호통을 쳤다.

청계4가에는 전자제품 전문상가인 세운상가와 ‘할렐루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라는 명조체 간판의 구 아세아극장이 나란히 맞붙어 있다.

기자에게 두어시간을 내준 세운상가 가동 나열 131, 132호 ‘뉴스타 전자’의 김운민 대표(68)는 말했다.

“중학생이던 6·25전쟁 때 ‘없는 게 없던’ 청계천변 노점상에서 100원에 구입한 고물 시계를 청량리역의 북한 인민군들에게 1300원에 되팔았다. 한양대 공대 기계과를 졸업한 뒤 소공동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에 있던 한국합동무역회사에 근무하다 텔레비전을 국내에 수입하던 신아세아 상사를 1960년대 초 인수했다. 인수 직후 국내 텔레비전 수입이 전면 중단돼 개당 1원에 인수한 텔레비전 부속품으로 3000원을 받는 애프터서비스 호황을 누렸다. 1967년 세운상가가 당시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로 들어설 때부터 이곳에서 일했다. 세운상가는 한국 전자기술의 모체다. 국내에 컴퓨터가 없던 시절 세운상가 엔지니어들이 홍콩 일본 등지에서 컴퓨터 부속을 사다가 조립하면 삼성 대우 등 대기업이 ‘메이커’(라벨을 뜻함)를 붙여 팔았다. 청계천 일대 부품을 끌어 모으면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세운상가 가게 사장의 30% 이상은 종업원 출신이다. 꿈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광장시장(청계4가)

을지로 4가 네거리의 지하도를 건너 다시 보도로 올라오니 하나둘씩 포목점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가 광장시장이다. 1905년 국내 최초의 근대시장으로 3500평 대지에 400여곳의 주단·포목 업소가 밀집해 있다.

돌잔치 때 입히는 색깔 고운 아기 한복을 구경하며 시장 안쪽으로 들어서니 수의(壽衣) 가게 30여 곳이 옹기종기 모인 골목이 나온다. 인간사가 왁자지껄 펼쳐지는 시장에는 삶과 죽음이 옷의 형태로 공존하는 것이다.

상인들에게 물어 역사가 오랜 수의 가게인 명신상회에 들어갔다.

‘인간 한계에 도전-에베레스트’ 커버기사가 실린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읽고 있던 김동사 사장(57)은 아버지(86)의 가업을 이은 2세대 수의상이다. 1960년대 초 광장시장에 수의 가게를 맨 처음 차린 사람이 김씨의 아버지다. 김씨는 한 신문사 보급소 지국장을 지내다가 1989년 사업을 물려 받았다.

죽음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할 것 같지만 실은 죽은 사람이 입는 수의야말로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남자는 21가지, 여자는 20가지를 갖춰 입는 수의는 15만원부터 400만원 짜리까지 있다. 경상도 안동포, 강원도 강포 등을 최고급품으로 친다.

“올케와 시누이가 시어머니 수의를 맞추러 함께 오면 대개 의견 충돌을 빚는다. 시누이야 자기 어머니니까 비싼 옷으로 맞추려 하고 며느리는 싼 것을 주장한다. 요즘에는 자신의 수의를 미리 준비해 두는 노인이 많다. 얼마 전에는 파출부 일을 하는 70세 할머니가 자식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손수 20만원짜리 수의를 맞춰 갔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화수분처럼 끝이 없나 보다.”

수의에 얽힌 사연을 듣는데 키가 껑충한 40대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와 노란색 면사를 20필이나 샀다. “삼베옷이 30벌 있다”는 그는 연분홍색 황포를 연방 겉옷 소매에 대 보더니 “너무 야하지 않나”하며 망설였다. 그가 돌아간 뒤 김씨에게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 하는 손님인데 포목을 많이 사 가나요.” “아, 우리 가게에 단골로 오는 박수무당이에요.”

소 허파, 문어, 칼국수, 찹쌀 순대, 막걸리와 소주 등을 파는 광장시장 북1문 방면 먹자골목은 오후 4시 무렵부터 소박한 음식을 찾는 서민들로 활기를 띤다.

● 시대가 변화를 요구한다:

평화시장(청계5가)→동화시장→동대문운동장

(청계6가)→수족관 상가(청계7가)

6·25전쟁 때 피란한 실향민들이 1961년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재봉틀을 갖추고 옷을 만들기 시작한 3층 슬래브 건물이 바로 국내 최대 규모의 옷 도산매시장인 평화시장이다. 1969년에는 통일상가와 동화시장도 생겨났다.

평화시장은 인근 신흥 두산타워(1999년)와 헬로 에이피엠(hello apM·2002년)에 20, 30대 젊은 손님을 내주고 송월타올, 평화양산 등 생필품 성격의 상점을 1층에 두고 있다.

단추 구슬 등 의류 부자재를 판매하는 동화시장의 단추가게 ‘금정’의 정순명씨(32)는 기자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검정색 실크 블라우스에 어울릴 자개단추 10개를 상냥한 태도로 골라줬다. 단추는 개당 100원이었다.

(왼쪽위부터 시계방향) 세운상가 뉴스타전자 김운민 대표, 광장시장 수의전문 명신상회 김동사 사장, 동화시장 단추가게 금정 정순명씨와 딸, 삼일아파트 19동 로얄패션 공주식 사장

양윤재 서울시 청계천복원 추진본부장이 15일 기자에게 건넨 말이 떠오른다.

“도시는 변화한다. 청계천의 낙후된 산업구조를 그대로 껴안고 가자는 주장은 낭만적 감상일 뿐이다. 이제는 싸구려 대신 고급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

하긴 청계천에도 진작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외국 디자인·인테리어 서적 전문인 평화시장 1층 헌책방 ‘홍문관’ 임원영 대표(51)는 말한다.

“1970년대에는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등 문학소설, 1980년대에는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처럼 이적표현물로 분류된 사상서가 인기였지만 1990년대 이후 디자인에 대한 수요가 높아져 자연스레 디자인 전문 헌책방이 됐다.”

제일평화시장 인근 노상에 텐트를 친 광분식에서 삼립 화이트식빵 두 장 속에 계란 프라이를 끼워 만든 토스트와 삼육 베지밀을 시켜 먹은 뒤 동대문 운동장으로 향하니 1926년 지어진 유서 깊은 운동장은 지난달 이미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20여개의 수족관 가게가 밀집한 청계7가의 해왕수족관 방온숙 사장(47)은 관상용 물고기를 통해 세상 사는 지혜를 배운다고 했다.

“물고기도 사람과 똑같아요. 욕심 부리면 탈 나요. 제 양보다 적게 먹이는 것, 어항 물(환경)을 갑자기 바꾸지 말고 1주일에 한 차례 4분의 1씩만 갈아 주는 것을 기억하세요.”

● 사라져가는 것에 대하여:

삼일아파트 (청계8가)

청계8가, 즉 황학동을 중산층이 취미로 중고품과 골동품을 찾는 호사스러운 장소로만 봐선 안 된다. 황학동에서는 900여명의 노점상이 생계를 꾸려간다. 비디오가게, 장어 진액 가게, 재고떨이 구두 가게 등의 상가는 삼일아파트 1, 2층에 둥지를 틀고 있다.

청계고가를 가운데 두고 종로구 창신동에 1∼6동, 숭인동에 7∼12동, 중구 황학동에 13∼24동 등 총 24개동이 들어선 7층짜리 삼일아파트는 청계고가 위에서 봤을 때는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황폐한 잿빛 슬럼 건물이다.

황학동 삼일아파트는 서민 주택난 해소와 불량 주택지역 정비를 목적으로 서울시가 1969년 건립한 시민아파트 중 하나로 삼일아파트(3300평)를 포함한 이 일대 1만4000여평에 대해 1993년 재개발사업계획이 결정됐다. 2001년 롯데건설이 시공사로 선정됐으며 7월쯤 착공해 2007년 33층 주상복합건물을 준공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2003년 5월 현재 삼일아파트 사람들을 만난다.

19동 2XX호. 문 밖으로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외국인 노동자 2명을 비롯해 5명이 일하는 로얄패션의 공주식 사장(46). 1970년대 후반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기술을 익힌 뒤 1988년부터 이곳에서 일해 평화시장 2층에 의류매장도 갖게 됐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5만원을 내고 있는 삼일아파트를 떠난 이후의 미래는 미처 계획하지 못했다.

17동 2XX호의 수 다방. 60대 이상의 노인들만이 4000원짜리 쌍화차를 시켜놓고 3시간 이상씩 시간을 때우던 이곳은 요즘 그나마도 장사가 안 된다. 구정희 사장(67)은 1985년 다방을 시작할 때 맡겼던 2000만원 보증금을 이미 다 까먹었다. 구 사장은 15일부터 딸기와 토마토로 1000원짜리 생과일 주스를 만들어 17동 앞 거리에서 팔기 시작했다.

16동 3XX호. 방 2개, 부엌, 손바닥만한 화장실, 마루가 딸린 11평짜리 아파트에는 70대 할머니가 홀로 산다. 660가구가 살던 삼일아파트에는 현재 임대아파트 분양권이나 3개월분 주거대책비를 받을 수 없는 무자격 세입자 70여가구가 흉흉하게 철거된 이웃집을 옆에 두고 산다. 삼일아파트는 워낙 견고하게 지어져 “옆집에서 악을 써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어쩌면 청계천 사람들이야말로 꽃과 물고기가 있는 청계천을 꿈꾸는지 모른다. 삶을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하는 욕구 또한 그 누구보다 강할지 모른다.

2003년 5월 청계천 사람들의 얼굴을 깨끗하게 복원된 후의 청계천에서 찾을 수 없다면 가슴이 뻥 뚫린 듯 허전할 것 같다. 지금은 허허벌판이 된 서울 관악구 신림동 난곡의 연탄가게며, 허름한 담벼락 앞에 심어진 상추의 파릇한 색깔이 뭉클하게 그리워지는 것처럼….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