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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기자의 현장칼럼]인형을 키우는 어른들

입력 | 2003-05-01 17:27:00

서울 홍익대 부근의 인형 카페 ‘커스텀 하우스’에서 지난달 26일 20대 여성이 자신의 ‘아이’인 구체관절인형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다. 신석교 기자 tjrry@donga.com


중세에는 어른과 어린이를 구분하는 인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어른도 인형을 갖고 놀았다 한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현대는 중세로 간다’고 했던가.

인형을 사랑하는 어른들, ‘호모 돌리안스(Homo dollians)’가 인터넷 공간에서 디지털 카메라라는 도구를 활용해 인형의 나라를 만들고 있다. 인터넷 동호회 ‘싸이월드 인형중독’과 ‘싸이월드 커스텀 하우스’에는 1일 현재 각각 4810명, 2608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다. 이들의 연령층은 주로 20, 30대. 대학생, 교사, 웹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등으로 특히 예술적 성향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많다. 동호회 가입기준도 엄격해 자신이 소유한 인형 사진을 찍어 웹에 올려야만 회원 자격이 부여되는 사이트도 있다.

디지털 카메라로 인형 사진을 찍어 웹에 올리는 호모 돌리안스의 인형놀이야말로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화려한 ‘유희’라는 생각을 했다.

● 새로운 언어와 가족 관계

지난달 26일 서울 홍익대 부근의 인형 카페 ‘커스텀 하우스’. 지난해 6월 문을 연 이 카페에는 수백 개의 인형이 진열장에 전시돼 있다. 8개의 테이블에는 내 ‘아이(인형)’를 데려온 20, 30대들이 둘러앉아 아이 자랑과 치장에 여념이 없다.

숙명여대 2학년 김모씨(21)는 지난해 8월 아는 사람에게서 65만원에 구입한 구체관절인형 ‘이니(여자)’와 2월 인형 관련 인터넷 사이트 ‘키스 기프트(kissgift.co.kr)’를 통해 102만원에 구입한 ‘페르(남자)’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이날 커스텀 하우스에서 또 다른 구체관절인형을 페르의 여동생으로 ‘입양해(구입해)’ ‘나래’라고 이름지었다.

“어떻게 세 명을 잘 키울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페르에게 여동생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장학금과 과외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아이들을 입양했죠.”

키 56∼63㎝, 몸무게 1㎏ 이상인 구체관절인형은 각 관절을 공과 고무줄로 연결해 움직임이 자유롭다. 인형 ‘오너(owner·소유자)’들은 우레탄 재질의 인형 얼굴을 사포로 갈아 턱을 갸름하게 만드는 ‘성형’을 하거나 시너로 기존 메이크업을 지운 뒤 아크릴물감이나 파스텔로 새롭게 꾸민다.

이날 이니가 입은 보라색 드레스와 모자는 5만5000원, 스타킹 1만2000원, ‘No war on Iraq’라고 프린트 된 페르의 반전(反戰) 티셔츠는 6000원이었다.

회사원 주모씨(23)는 1월 인터넷 사이트 ‘해피돌(happydoll.co.kr)’에서 89만원에 구입한 13세(인형회사에서 지정한 나이) 구체관절인형 ‘신라(여자)’를 앉혀 놓고 가녀리게 뻗은 신라의 손가락을 청소용 스펀지 매직블록으로 깨끗이 닦아줬다.

“신라가 비싸다고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 딸래미인 걸요. 애를 안고 외출하면 사람들이 우리 애를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듯 해서 평소에는 카메라 삼각대 가방에 넣고 다녀요. 난 남동생과 장난감 총 만들며 자랐어요. 우리 신라는 여성스럽고 귀하게 키워 주고 싶어요.”

초등학교 교사 이모씨(25)는 남자 ‘아이’에게 검정 교복을 입혀 ‘데려왔다’. 일본 소년만화 ‘원피스’, ‘고스트 바둑왕’ 등을 좋아하는 이씨는 얼마 전 한 카페에서 아이의 백일사진을 공들여 찍어줬다. 남들처럼 케이크 차린 성대한 백일잔치는 못 열었지만 대신 조만간 동생을 데려오기로 했다.

“애완동물 키우는 것이랑 똑같아요. 자동차 좋아하는 남자들이 자동차를 애인 다루듯 하는 것과도 같고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형에게 인격을 부여해 가족으로 삼는 거예요. 사랑은 결국 소유인데, 사람은 소유가 안 되잖아요.”

20, 30대 여성 ‘오너’들은 예쁜 여자 ‘아이’ 못지 않게 남자 ‘아이’의 입양을 선호한다. 다음은 구체관절 인형 판매 인터넷 사이트 ‘하이퍼매니악(hypermaniac.com)’에 오너들이 올린 ‘입양하고 싶은 아이’의 유형.

‘중성적 이미지의 14세 소년’, ‘도도해 보여 정이 안 갈 것 같지만 볼수록 섹시한 왕자님’, ‘여성스러운 얼굴의 꽃미남’, ‘꿈을 꾸는 듯한 몽환적 느낌의 아이’….

●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

블라이스(Blythe) 인형은 디지털 사진이 특히 예쁘게 찍히는 인형이다. 블라이스 인형 국내 공급업체 ㈜손오공의 김명희 과장은 “블라이스 인형을 파는 오프라인 매장이 거의 없는데도 이 인형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강렬한 인상의 디지털사진과 인터넷의 힘”이라고 말할 정도다.

전체 키 29㎝ 가운데 얼굴 길이가 11㎝를 차지할 만큼 기형적으로 얼굴이 큰 데다 가슴-허리-엉덩이 둘레 사이즈가 각각 11㎝, 7.5㎝, 10㎝인 몸매는 결코 볼륨감이 없는데도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보면 신기할 정도로 ‘포토제닉’하다.

웹디자이너 임현묵씨(29)는 평소 조명이 예쁜 카페를 찾아다니며 블라이스 사진을 찍는다. 임씨는 서울 경복궁 근정전의 계단, 싱그러운 초록색 잔디가 깔린 공원에서 야외 사진을 찍으면 블라이스의 매력이 한층 살아난다고 말한다.

“블라이스는 약간 심통맞게 생긴 게 매력이에요.”

음악 CD 3000장, 흰색 운동화 30개를 수집하던 회사원 노성래씨(28)는 지난해부터는 액션피겨 인형(만화 게임 등의 인기 캐릭터를 인형으로 제작한 것) 100여개를 모았다. 지난해 11, 12월 두달 동안만 인형 구입비로 500만원을 썼다.

노씨는 틈나는 대로 500만 화소의 니콘 디지털 카메라로 인형을 찍으며 ‘논다’. 일본 만화 ‘도쿄 트라이브’의 근육질 주인공 메라와 카이, 만화 ‘배가본드’의 사무라이들을 12인치로 재현한 액션피겨 인형들의 사진을 찍어 부지런히 웹에 올린다.

● 사랑의 기술

서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권준수 교수는 “인형 마니아들은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는 인형과 교류하는 것이 사람 사귀는 것보다 편리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민성길 교수는 “그들은 인격 발달이 미숙하다”고도 했다.

과연 그럴까.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인형도 노트북 컴퓨터, 와인, 오디오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애착과 열정을 갖는 대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인형을 아이로 대하며 수집하는 행위는 의인화 과정을 통해 애정을 표출하는 것으로 결국 문화의 경계와 틀이 무너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호모 돌리안스가 인형에 쏟는 사랑과 인형이 인간에게 주는 평화와 신뢰, 그 어느 쪽이 더 무게 있을지 새삼 궁금해졌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