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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김상환/이 땅에서 철학하는 괴로움

입력 | 2003-04-08 18:55:00


세계대전의 조짐이 엿보이던 1930년대 초의 일이다. 국제연맹 산하의 한 기구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긴다. 인류를 전쟁의 위협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방책을 세우기 위해 당대의 지식인들과 의견을 교환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제안을 수락한 아인슈타인은 먼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인간의 파괴본능과 전쟁의 관계를 묻는다. 이렇게 시작된 이들의 편지는 전쟁의 본질과 세계 평화의 가능성을 짚어내는 귀중한 분석과 예견을 담고 있다.

▼전쟁을 바라보며 느끼는 무력감 ▼

프로이트 전집에 수록된 이 서신 교환에서 인상적인 것은 오늘날에도 타당한 그들의 지적 통찰만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전쟁이라는 긴박하고도 복잡한 문제 앞에서 지식인으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고백하고 있다. 분석이 깊어지고 구상이 이상적일수록 현실주의자들의 냉소를 받기 쉽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는 철학도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이 밖에 프로이트가 ‘팍스 로마나’를 언급하는 대목도 현 시점에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이 말은 로마의 지배 아래 성립하던 평화를 뜻하고 이 평화는 일단 독점된 폭력과 그에 기초한 법률적 강제력이 가져온 질서로 새길 수 있다. 하지만 이상적인 의미에서 새길 때 그 말은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단순히 무력과 법에 의한 통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화적 통일을, 나아가 감성적 유대관계까지 의미하는 것이다.

요즘의 세계를 ‘팍스 아메리카나’로 요약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런 이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엄밀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군사나 경제 측면에서 미국의 의사를 거스를 수 있는 나라는 별로 없지만 문화나 감수성의 측면에서 전 지구적 차원의 통일은 요원할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이다. 유럽이나 중국은 고사하고 작은 나라 한국에서마저 미국의 일방주의에 반발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경제 군사면에서 미국에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한국에서 왜 반미 감정이 일고 현실 정치에까지 힘을 미치는 것일까. 단지 현대사에서 미국이 맡았던 악역들을 이제 새삼 기억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거칠게 말해서 그것은 어떤 대국 앞에서도 양보하기 어려운 감수성과 문화적 특이 체질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보편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한반도의 특수성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체질화되어 있고 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하나의 동기가 대미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쭐할 단계는 멀었음이 틀림없다. 어떤 문화적 체질을 확인한다는 것과 창의적 역량을 증명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인이 아직 선보인 적이 없는 무슨 위대한 작품이나 제품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른바 남남(南南) 갈등이라는 유사 전시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이라크전쟁보다 오래 갈 것이 분명한 이 정치적 소요는 갈수록 한국인의 정서적 유대관계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홍콩인들을 공포에 빠뜨린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보다 더 심각해 보인다.

지루하고 소모적으로 이어지는 이 싸움 앞에서 지식인은 여러 가지 역할을 맡고 있다. 어떤 이는 검사처럼 한쪽의 주장에 죄를 묻고 어떤 이는 변호사처럼 그런 혐의에 맞서 옹호와 정당화에 나선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판사처럼 양쪽의 주장을 공정하게 저울질하려 한다. 갈등 상황은 당연히 그런 역할 분담을 요구할지 모르지만 참으로 부족한 것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싸움이 되풀이되지 않을 내일을 생각하고 그런 미래를 준비하는 역할담당자이다.

▼南南갈등 해법도 지식인의 숙제 ▼

그런 준비는 현실주의자의 조롱을 받을 정도로 갈등하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변을 요구하고 인간의 감성적 유대관계의 뿌리를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현재의 싸움을 보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과학적 이성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이성이고 승패의 지름길을 겨냥하는 의지보다는 정도를 가는 여유인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가 나누었던 종류의 대화가 필요한 것인데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 철학을 한다는 나의 무능력이 창피할 뿐이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