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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철학하기'를 위한 책 3권 "칸트가 안부럽다"

입력 | 2003-01-10 18:01:00



◇처음 생각할 때처럼

노야 시게키(野矢茂樹)·우에다 마코토(植田眞) 지음/양억관 옮김/231쪽/9000원/세종서적

◇생각

사이먼 블랙번 지음/고현범 옮김/448쪽/1만8000원/이소출판사

◇감정

딜런 에번스 지음/임건태 옮김/216쪽/1만2000원/이소출판사

저명한 인지과학자인 미국 터프츠대의 대니얼 데닛 교수는 인공지능 문제를 논하면서 ‘R2D1’이라는 로봇을 하나의 예로 제시한 적이 있다. R2D1은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로봇인 R2D2의 이전 모델을 가상한 것이다. 꽤 똑똑한 R2D1은 주어진 조건에서 논리적으로 결과를 추론해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R2D1에 과제가 주어졌다. 밀폐된 방 안에 놓인 왜건 위에 시한폭탄과 배터리를 올려놓고서, R2D1이 그 안에 들어가 제한된 시간 안에 자기 몸의 배터리를 갈아끼우고 방을 빠져나오는 과제다. 그런데 R2D1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꼼짝도 않고 생각만 했고 그 사이에 시한폭탄은 폭발하고 말았다. 주어진 조건에서 가능한 모든 결과를 생각한 탓이었다. ‘배터리를 갈다가 떨어뜨리면 시간이 초과하지 않을까’, ‘시한폭탄을 내려놓은 후 왜건을 밀고 나오는 것이 빠를까’, ‘왜건을 움직일 때 방의 온도가 변해서 폭탄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고독한 햄릿처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R2D1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많은 이들에게 ‘철학 ’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생각 ’또는 ‘철학 ’에도 요령은 있다.생각하는 방법을 다룬 책들을 통해 철학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 글뿐 아니라 ‘처음 생각할 때처럼’의 여유로운 삽화는 독자들을 사색으로 이끌어 준다./그림제공 세종서적

이 로봇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간은 뭔가를 행할 때 방대한 상식을 배경에 깔고 있다. 주어진 조건에서 가능성은 무수히 많지만 ‘상식’적으로 명백한 일은 검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생각’이 필요하다. 깊은 ‘생각’을 통해 좀 더 많은 가능성을 모색하고 다가올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려다 보니 ‘생각’을 전문으로 하는 ‘철학’이란 학문도 생겨났다.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일이다 보니 ‘철학’이란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생각’ 또는 ‘철학’에도 요령은 있다.

두 권의 책 ‘처음 생각할 때처럼’과 ‘생각’은 독자 대신 생각한 결과를 정리해 주는 대부분의 철학책과 달리 ‘생각하기’ 또는 ‘철학하기’의 방법을 알려준다. ‘철학에 관한 책’이 아니라 ‘철학하기를 위한 안내서’다.

‘처음 생각할 때처럼’은 우선 ‘쉽다’. 일본 도쿄대 대학원의 노야 시게키 교수는 독자와 함께 생각하는 방법을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의 요령을 제시한다. 문제를 명확히 이해할 것, 논리를 활용하되 때로는 과감히 직관을 따를 줄도 알 것, 생각의 도구인 언어를 갈고 닦을 것, 밖을 향해 시선을 열어둘 것, 타인과 많은 대화를 나눌 것. 일러스트레이터인 우에다 마코토의 여유로운 삽화들은 독자들을 사색으로 이끄는 또 한번의 기회를 제공한다.

노야 교수의 책에 비해 영국 케임브리지대 사이먼 블랙번 교수의 ‘생각’은 좀더 학구적이다. 블랙번 교수는 데카르트의 ‘성찰’, 버클리의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 흄의 ‘인간오성론’ 등 철학의 고전을 인용하며 이들 철학자들이 사유해 간 과정 속에 독자들이 참여하게 한다.

이 두 권의 책이 언어와 이성과 논리를 통한 철학과 사유의 길을 안내한다면 ‘감정’은 서양의 근대 철학에서 소홀히 다뤄져 온 또 다른 인간의 영역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진화심리학, 로봇공학, 인지과학, 과학철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저자(영국 바스대 책임연구원)는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간의 감정이 인간의 생존과 진화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 왔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알려 준다.

‘철학’의 무대에 관객이 아니라 배우로 참여해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들이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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