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의 정치이력은 3김(金)과 얽힌 애증(愛憎)의 발자취였다. 긴장과 갈등으로 이어진 3김과의 정치함수는 역설적으로 그를 두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나서도록 한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30여년 동안 판사로 활동한 이 후보는 93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 의해 감사원장으로 발탁됐다. 국무총리까지 오른 것도 감사원장으로서 ‘성역없는 사정’을 주도하면서 얻은 개혁적 이미지가 발판이 됐다.
그러나 이 후보가 94년 4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총리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YS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이 후보는 재임 127일만에 총리직을 사퇴했다. 재임기간은 짧았지만, 그에겐 ‘대쪽 총리’라는 트레이드마크가 붙었다.
그가 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6년 전인 96년1월.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선대위의장으로서 15대 총선의 사령탑을 맡았다. 국정난조로 위기에 몰린 YS가 이 후보를 ‘정국 돌파카드’로 보고 다시 손을 내민 것이다. 총선 압승으로 그는 성공적으로 정치권에 데뷔했다.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선출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첫 대권 도전은 순탄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들 병역면제’라는 뜻밖의 암초에 부닥친 데다 김대중(金大中) 당시 국민회의 후보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재가 손잡은 ‘DJP연합’의 벽을 넘지 못했다.
대선 패배 후는 시련의 나날이 이어졌다. 이 후보를 겨냥해 총풍(銃風), 세풍(稅風), 병풍(兵風) 등이 휘몰아쳤다. 98년8월 한나라당 총재로 복귀한 그는 외풍에 맞서며 반 DJ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다. ‘반 DJ정서’에만 의지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그를 야당의 구심점으로 키워놓은 장본인은 DJ였다. 특히 이 후보가 ‘이회창 대세론’을 앞세워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설 수 있게 된 데는 DJ의 실정(失政)도 한몫을 했다.
한동안 이 후보와 불편한 관계였던 YS는 최근 이 후보 지지를 선언했고, DJ는 대선중립을 선언했지만 대립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JP의 심사는 여전히 ‘안개속’이다. 3김 정치 청산을 기치로 내건 이 후보가 새로운 정치를 열어갈 수 있을지 중대고비에 서있는 셈이다.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노무현 후보▼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의 정치역정은 3김정치, 즉 지역분열 정치에 대한 도전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원외정치인에 불과했던 그가 ‘노풍(盧風)’을 타고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부상한 데에는 정치입문 이후 14년간 일관되게 추구해온 이런 정치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제의로 88년 13대 총선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한 그는 그 해 5공 비리 청문회에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으나, 90년 3당합당을 거부하고 스스로 시련의 길을 선택했다. 탄탄대로가 보장된 거대 여당에 합류하는 대신 주저없이 YS와 결별한 것이다.
이후 야권통합에 나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통합민주당을 함께 했지만, 95년 DJ가 4번째 대권 도전을 위해 통합민주당을 깨고 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야권분열’이라며 역시 합류를 거부했다.
그러나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그는 수평적 정권교체와 동서통합을 명분으로 DJ와 다시 손을 잡았고, DJ와의 재결합은 그에게 재기의 활로가 된다.
2000년 4월 16대 총선. 그는 자신의 정치적 고향이면서도 92년 총선과 95년 시장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안겨준 부산 출마를 감행한다. ‘적지(敵地)’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대권의 꿈을 품고 있었던 그에게는 피할 수 없는 ‘도박’이었다.
그는 또다시 낙선했다. 하지만 그의 ‘도박’은 대권 도전의 싹을 틔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세 번째 낙선을 계기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라는 자발적 팬클럽이 태동했고, 이는 ‘정치지도자 노무현’으로 자리매김하는 발판이 됐다.
그의 개혁노선은 상당부분 DJ의 것과 맥을 같이하지만, 승부사적 기질은 YS를 빼닮았다는평가도 받는다.
4월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뒤 6·13지방선거 패배에 이은 당내 분란으로 ‘중도낙마’의 위기에 처했지만, 그는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후보와의 단일화라는 승부수를 던졌고, 불리하던 상황은 일거에 반전됐다. 이제 그의 정치실험은 마지막 기로에 서있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