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25일 담화는 멕시코 로스카보스에서 열리는 한미일 3국 정상회담(27일 새벽·한국시간) 테이블에 던지는 ‘북한식 핵문제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담화 발표 시점으로 보면 특히 그렇다.
눈에 띄는 대목은 한미 양국이 요구하는 ‘선(先) 핵 폐기’를 거부하면서도 미국에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제안한 점이다.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시(3∼5일) 북한 외무성 강석주(姜錫柱) 제1부상이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선제공격 중단, 평화협정 체결, 경제제재 해제 등 3대 요구 조건에서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이 북-미관계가 대결국면을 보일 때마다 늘 3대 요구를 한 묶음으로 제시해왔다는 점에서 볼 때 뭔가 내부에 변화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외무성 대변인은 “작은 나라인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 해결방식의 기준점은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에 대한 위협 제거”라고 덧붙였다. 미국의 대북 불가침만 확인된다면 핵을 포함한 모든 문제를 협의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북한의 이런 변화는 켈리 차관보 방북 후 조성되고 있는 미국 내 강경기류에 대한 북한의 불안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북한 내부적으로도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 체제에 대한 미국의 보장을 받아내는 것은 먼 훗날에나 가능한 일이고, 당장 시급한 일은 미국의 무력공격을 피해나가는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마디로 북한 지도부가 ‘9·11 테러 이후의 미국’을 서서히 실감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국대사는 21일 강연에서 “북한은 9·11 이후의 미국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통일연구원 허문영(許文寧) 연구위원도 “북한의 불가침조약 체결 요구는 미국의 강경한 입장에 두려움을 갖게 된 북한이 미국의 선제공격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아보자는 의도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외무성 대변인의 언급 중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핵무기 보유여부에 대한 언급이다. 대변인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주었다”고 말했다. 이 대목은 핵무기의 보유여부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서 만약 핵무기 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핵압살 위협’을 하고 있는 미국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 위협’을 부각시킴으로써 국제사회의 ‘동정여론’을 조성하고, 특히 한일 양국 정상이 한미일 3국 정상회담 때 미국에 이 점을 주지시켜 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북한 핵 문제 관련 미국과 북한 정부의 공식 성명서 비교항목미 국무부 대변인 성명서(10월17일)북 외무성 대변인 담화문(10월25일)핵 프로그램 시인-미측이 북측의 농축우라늄 핵 프로 그램 관련 정보를 최근 확보했다고 말하자 북측은 그런 프로그램을 갖 고 있다고 시인했다.-미국의 가중하는 핵 압살 위협에 대 처하여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다는 것을 미측에 명백히 말했다.제네바합의 위반 문제-북한은 제네바합의가 무효화된 것 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은 제 네바합의상 북한의 의무 등을 심각 하게 위반한 것이다.-미국은 조-미 기본합의문(제네바합 의) 이행문제에 대해 말할 자격을 상실했다.
-부시 행정부가 우리를 ‘악의 축’으 로 규정한 것은 명백한 선전포고로 써 조-미기본합의문 등을 완전히 무 효화시킨 것이다.이번 사태 해결 방안-북한이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핵무 기 프로그램을 제거할 것을 촉구한 다.
-우리는 이번 상황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코자 한다.-미측의 주장은 결국 우리보고 굴복 하라는 것이다. 굴복은 죽음이다.
-미국이 먼저 불가침을 확약하면 미 국의 안보상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다.북-미 간 포괄적 협상 방안-북한이 대량살상무기, 미사일, 테러 지원 등에 대한 행태를 근본적으로 바꾸면, 북한 주민을 위한 정치 경 제적 조치를 제안할 준비가 돼 있었 다.-미국이 우리 자주권을 인정하고, 불 가침을 확약하며, 우리의 경제 발전 에 장애를 조성하지 않는 (3대) 조 건에서 핵 문제 등을 협상 통해 해 결할 용의가 있었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北 외무성담화 요지▼
우리는 특사의 방문을 통하여 부시 행정부의 적대적 기도가 최절정에 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미국 특사는 아무런 근거자료도 없이 우리가 핵무기 제조를 목적으로 농축우라늄 계획을 추진하여 조(북한)-미 기본합의문을 위반하고 있다고 걸고들면서 그것을 중지하지 않으면 조-미대화도 없고 특히 조-일관계나 북남관계도 파국상태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다.
1994년 10월 조-미기본합의문이 채택되었으나 미국은 그 이행문제에 대해 이미 말할 자격을 상실한 지 오래다. 기본합의문의 4개 조항 중에 미국이 준수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부시 행정부가 우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 선제공격 대상에 포함시킨 것은 명백히 우리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조-미공동성명과 조-미기본합의문을 완전히 무효화시킨 것이다.
우리는 미국 대통령 특사에게 미국의 가중되는 핵압살 위협에 대처하여 우리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주었다.
지금 미국과 일부 추종 세력들은 우리가 무장을 놓은 다음에 협상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논리이다. 우리가 벌거벗고 무엇을 가지고 대항한단 말인가. 결국 우리보고 굴복하라는 것이다. 굴복은 죽음이다.
미국이 불가침조약을 통해 우리에 대한 핵 불사용을 포함한 불가침을 법적으로 확약한다면 우리도 미국의 안보상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다.
작은 나라인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 해결방식의 기준점은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의 위협의 제거이다. 이 기준점을 충족시키는 데는 협상의 방법도 있을 수 있고 억제력의 방법도 있을 수 있으나 우리는 될수록 전자를 바라고 있다.
주체91 2002년 10월 25일 평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