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종종 두렵고 고통스럽다. 때로는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북한이 불쑥(그들로서야 나름의 치밀한 계산이 있었겠지만) 핵개발을 위한 비밀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고 털어놨을 때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며 사실 여부를 추궁하던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정작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남한 국민이 받은 충격은 켈리 특사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핵개발의 진실’은 두렵고 고통스럽고 파괴적이다. 차라리 몰랐다면, 그래서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 응원차 내려왔던 북녘의 꽃미녀들이 눈시울을 적시며 북으로 돌아가던 모습을 마음에 담고 있을 수 있었다면 오히려 그 편이 나았을 터이다.
▼실리 취하고 도박하고▼
그러나 세상사 아는 게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라고도 하지만 이제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평양정권은 오랫동안 ‘통미봉남(通美封南)’을 고집해 왔다. 거래는 미국과 하는 것이지 남한과는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997년 6월 공로명(孔魯明) 전 외무장관은 ‘김영삼(金泳三)-김일성(金日成) 회담’(94년 7월)이 성사되었다면 남북관계가 크게 진전되지 않았겠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설령 김-김 회담이 성사됐더라도 그들은 결국 자기네 체제유지를 위한 시간 벌기에 이용하려들었을 것이란 게 당시 공 전 장관의 답이었다.
2000년 6월 ‘김대중(金大中)-김정일(金正日) 회담’이 이루어졌을 때 필자는 공 전 장관의 해석이 시효만료됐다고 생각했다. 그 같은 과거의 대북(對北) 인식틀에서는 벗어날 때가 됐다고 믿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에는 급격히 ‘통남봉미(通南封美)’로 치우치는 듯한 흐름이 오히려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북이 핵개발 사실을 거칠게 시인했을 때 공 전 장관의 해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평양정권은 부시 행정부의 ‘악의 축’ 위협에 맞서려면 핵카드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또 핵을 내세워 미국과 큰 거래를 이뤄내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명분을 앞세우든 핵을 개발하면서 남북 평화공존을 말할 수는 없다. 결국 북은 그들의 체제문제에 관한 한 ‘통미봉남’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남한 김대중 정부의 ‘햇볕’에서는 철저히 실리를 취했을 뿐이다. 실리를 취했으면 최소한 평화를 보장해야 한다. 그런데 북은 다시 핵을 앞세워 민족 전체의 생존권이 걸린 위험천만한 도박을 벌이고 있다.
진실이 고통스럽고 파괴적이라고 하더라도 의혹 또한 묻고 갈 수는 없다. 이른바 대북 뒷거래설이란 어차피 준 쪽에서 얼마 줬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받은 쪽이 ‘그래, 얼마 받았소’하기도 어려운 사안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설(說)이 설(舌)을 타고 흘러나온 이상 그냥 삼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삼킬 수 없으면 뱉어야 한다. 아니, 1달러도 안 줬다는데 무슨 얘기냐고 버틸 게 아니다. 소줏집 술청에서 들리는 얘기는 대충 이러하다.
“아, 남북 정상회담하는데 저쪽에서 얼마 달라고 안 했겠나. 무슨 공연 하나 하는데도 뒷돈을 줘야 한다면서.”
“그러게 말이야. 기왕 준 것 줬다고 하면 어쩌겠나. 이제 와서 저쪽에 대고 물어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말야.”
받은 쪽 체면도 생각해야 한다면 쉬운 일은 아닐 게다. 하지만 저쪽 체면을 고려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다. 일껏 뒷돈 대줘 핵개발하는 것 도와줬느냐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필자는 물론 이런 단순논리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그럴수록 진실을 밝혀야 한다. 비록 진실이 파괴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창조적 파괴’가 될 수 있다.
▼진실 없는 ´햇볕´은 허구▼
정 아니라면 아닌 대로 진실을 밝히면 된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서 부당대출 받은 4000억원의 행방을 계좌추적으로 밝혀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모든 국가기관이 계좌추적 얘기만 나오면 고개를 젓는다. 이래서야 의혹이 풀릴 길이 없다. 이제 진실 없는 ‘햇볕’은 더 이상 ‘햇볕’이 아니다. 진실 없는 남북공존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북핵이 그것을 말해준다. ‘진실 게임’을 해야 한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