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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의 만화세상]백성민 '역사 그리기' 한국 1인자

입력 | 2002-03-31 17:30:00


1973년 ‘권율장군’으로 데뷔했으니 작가 활동의 연수를 따지자면 무려 30여년이 되어간다. 꽤 오랜 시간이지만 대표작 목록은 매우 단촐하다. 고작 1년에 1권 정도의 분량이다. 백성민은 뽑아내기식 물량경쟁의 와중에서 30여년간 자신의 작품 세계를 지켜온 과작(寡作)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스스로 부족하고 어리석어 그렇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의 몇 안되는 작품을 통해 그가 한 편, 한 편 작품에 쏟은 노력을 읽을 수 있다.

‘장길산’ ‘황색고래’ ‘토끼’ ‘삐리’ ‘상자하자’와 같은 백성민의 역사 만화가 한국 만화를 풍요롭게 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백성민의 선이 가장 한국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모두 백성민의 노력과 끈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길산’ 이후 백성민은 한국을 대표하는 빼어난 역사만화가로 자리잡았다. 그의 만화에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았던 조선의 얼굴, 몸, 산하가 살아있다. 얼굴의 주름 하나, 두루마기의 선과 갓의 곡선, 달리는 말의 모양새가 평면적이지 않고 역동적인 힘을 담고 만화의 칸에서 움직인다. 펜과 붓으로 토해내는 선은 개념적인 ‘선’을 넘어서, ‘힘’이 된다.

2001년 백성민은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냈다. 인터넷이라는 낯선 매체에 작품을 연재하기도 했고, 연재하던 잡지가 폐간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원고를 분실한 잡지와 맞서 작가의 권익을 지켜내기도 했다.

백성민의 최근작은 인터넷에 연재한 작품을 묶은 ‘상자하자’다. 다양한 형식적 실험과 탐구가 돋보인 이 작품은 조선 개국 초기의 풍운아 이방원의 일상을 다뤘다.

백성민은 ‘상자하자’를 끝으로 모든 연재를 정리하고 신작을 준비중이다. 2002년부터 출판될 신작은 성경만화. 신약 5권, 구약 10권 예정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장길산’ 이후 20여년만에 다시 전작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연재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작품의 완성도를 조절하는 무서운 싸움이다. 작가는 “재주가 아닌 정성으로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힘들다”고 말했다. 2002년 들어 작가는 오로지 이 작업에만 매달렸다. 배경과 복식 등 관련 자료를 찾고 성경을 읽었다. 그래도 아직 출발하지 못했다.

그는 “만화체로 그리자니 뭔가 찜찜하고, 사실화로 그리면 독자들이 불편해 할 것이고. 기다리면 뭔가 해결점이 보일 것 같다. 그래서 책보고 준비하고 자료 모으고, 사색하고 있다”고 최근의 근황을 전했다. 최초의 전작 장편 ‘장길산’을 통해 예전의 버터냄새 나는 그림체를 버리고 된장내의 그림체를 얻었듯이, 이번 성경 만화를 통해 백성민은 또 한번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성경만화의 멋진 데뷔를 기다린다. 적어도 올해 안에 첫 번째 결과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