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CBS 스튜디오 주조종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방송계가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면서 미국 방송의 변화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998년부터 디지털 방송을 시작한 미국 방송계는 방송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서 비롯된 여러 문제를 이미 겪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 매체간 경쟁으로 인한 지상파와 지방 방송사 사이의 갈등, 미디어간 합병으로 인한 독과점 방지 문제, 저질화로 흐르는 방송 프로그램 등이 그것. 이런 문제들은 올해 11월 디지털 방송 시대의 첫 걸음을 뗀 한국 방송계에 여러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미국 현지 취재로 미국 디지털 방송의 현장을 짚어본다.》
▽디지털 시대, 시장을 선점하라〓 미국방송사협회(NAB·National Association of Broad-
casters)는 미국 최대 규모의 방송 관련 기구 중 하나. 허지만 미국 방송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4대 전국 네트워크 방송사인 ABC CBS NBC FOX는 “시장 점유율 제한 비율을 높여 달라”며 최근 NAB를 탈퇴했다.
이들 4대 네트워크는 “한 방송사가 전체 시장 점유율(House Hold)의 35%를 넘길 수 없다고 한 FCC의 규정은 수정헌법 1조에 위배된다”며 “한 방송사의 시장 점유율을 최대 45%까지 높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군소 네트워크와 지역 민영방송으로 구성된 NAB는 고문 변호사를 동원해 의회 등 워싱턴 정가에 로비를 펼치고 있는 상황.
FCC 입구에 있는 60인치 HDTV 수상기
미국 방송 통신 산업의 인허가와 인수 합병 등을 규제하는 미 연방방송통신위원회(FCC·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위원장 마이클 파월)는 일단 4대 네트워크의 주장에 유보적인 입장이다. FCC 기획정책실의 조나단 레비 부국장은 “법원 등 다른 독점관련 기관과 의견을 조율 중”이라고만 설명했다.
이렇듯 미국 방송계는 매체가 폭증하는 디지털 방송 시장을 둘러싸고 대형 방송사의 몸집 불리기와 중소 방송사의 충돌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FCC는 4월19일 4대 네트워크가 신생 네트워크를 합병할 수 있도록 규칙을 개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 NAB의 데니스 와튼 부회장은 “FCC가 4대 네트워크의 시장 독점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FCC는 연초 취임한 파월 위원장이 탈규제와 시장 경쟁 방침을 거듭 천명한 이후 거대 방송사의 세불리기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어 중소 방송사들은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저질로 치닫는 콘텐츠〓디지털 시대를 맞아 방송 시장 확대를 노리는 지상파 프로그램은 갈수록 선정적 폭력적이 되고 있다. 특히 9·11 테러 이후 광고 시장 위축 등으로 매체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프로그램의 저질화가 두드러지고 있는 상황.
현재 FCC는 방송 콘텐츠 보다는 하드웨어 규제에 주력하고 있으나, 매체가 급증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콘텐츠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FCC는 개별 법으로 선정적인 프로그램의 방송을 금지하고 있으나 시청자들의 항의가 있어야만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실제 기자가 겪은 미국 방송의 저질 콘텐츠 사례. 7일 로스앤젤레스 CBS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심야 토크쇼 ‘폴리티컬리 인코렉트(Politically Incorrect)’의 녹화 현장에 방청객으로 참석한 기자는 녹화 시간 30여분동안 진행자인 코미디언 빌 마어가 남성 성기와 자위행위를 뜻하는 단어를 각각 5번 이상 내뱉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화면은 그날 밤 자정 넘어 여과없이 방송됐다.
FOX 방송이 매주 토요일 밤 8시(미국 동부시간 기준)에 방송하는 ‘캅스(COPS)’는 그 내용만 봐도 모방 범죄가 가능할 정도로 선정적인 범죄 재연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저질은 중소 방송사들도 마찬가지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시청자단체인 ‘그레이드 더 뉴스’가 작년 한해 동안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등 2개의 지역 신문과 ‘채널 2’ 등 4개 지역 방송사의 콘텐츠를 분석한 결과, 신문은 평균 ‘A-’, 방송은 ‘C-’를 기록했다. 방송의 신뢰도가 신문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결과다.
‘그레이드…’의 존 맥머너스 정책실장(언론학 박사)은 “공공성이나 뉴스 가치 등에 있어서 방송이 신문보다 월등히 떨어졌다”며 “연방 정부 차원에서 프로그램의 질을 신경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 미디어 교육〓시청자보다 시장지향적인 콘텐츠를 쏟아내는 상업 방송에 대해 “시청자의 볼권리를 되찾자”는 미디어 교육 운동이 미국에서도 가열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상업 방송이 지배해온 미국에서 이같은 미디어 교육 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디지털 시대 방송 환경이 시장과 기술 일변도로 나아가면서 시청자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프로그램이 양산되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 인근 산타모니카에 본부를 두고 있는 미국 유일의 전국 규모 미디어 교육 단체인 ‘CML(Center for Media Literacy)’은 미디어 교육 교재를 직접 제작해 초 중 고교에 배포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CML의 테사 졸스 회장은 “학부모를 중심으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어 정규 교과 과정에 미디어 교육을 포함시키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며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미디어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미디어 교육 단체 ‘저스트 싱크 재단’은 ‘디지털 빈익빈부익부’의 불평등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이 재단의 엘레나 로센 사무총장은 “6㎜ 디지털 카메라만 주면 빈민층 아이들도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며 “정부 차원의 종합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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