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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철칼럼]국민사기 떨어뜨리는 罪

입력 | 2001-09-12 18:25:00


세계 유일 초강대국을 자임해온 미국의 심장부를 일순에 무너뜨린 사상 유례없는 테러공격을 보면서 본 칼럼 주제로 생각한 국민 사기와 국력간의 상관관계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노린 것은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국방부) 건물이 아니다. 미국의 자존심과 미국민의 사기를 겨냥한 것이다. 무너진 미국민의 사기는 한동안 땅바닥 잿더미 속에 묻힐 수밖에 없다. 미국과는 다른 이유지만 최근 한국사회에는 국민 사기가 떨어지는 현상이 역력하다. 특히 정치무대에서다.

임기 후반에 들어선 대통령의 의중을 겨냥한 JP의 일격(一擊) 충격에 이어 바로 그 정파에서는 정치적 배신이란 이유를 내세워 ‘단칼’이란 별칭의 당 총재를 그야말로 단칼에 제명하는 용맹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대통령 중심제에서 더욱이 당 총재직까지 겸하고 있는 대통령의 인사령(人事令)에 대해 집권여당 안에서 논란이 벌어진 것도 흔한 일이 아니다. 탈당 불사에 동교동계 해체론까지 나왔으니 대통령의 임기 후반을 의식했는지 몰라도 예삿일이 아니다. 여기서 어느 주한 외교사절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국생활이 어떠냐는 물음에 그는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바람에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비꼬는 말이었다.

예측불가의 사건들은 왜 일어났는가.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오다가 마침내 뚜껑을 연 대통령의 당정개편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소수정권, 여소야대 정국, 초심, 순리와 정도(正道) 등등 그동안 대통령에게 여러 가지 메시지를 전했지만 반영된 흔적이 없다. 요즘 시중에 부쩍 나돌고 있는 ‘오기(傲氣)정치’란 말은 그래서 실망하고 짜증난 국민이 뭉쳐서 만들어낸 것이다.

▼사기가 죽으면 국력이 무너진다▼

집권층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정쟁, 당리당략으로 인한 정치의 비생산성과 무기력이 국민에게 무력감을 안겨 주고, 혐오감을 갖게 하고, 급기야는 정치불신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은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잔소리가 돼버렸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더 크고 치명적인 문제가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는 점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집권층이 국민에게 떠넘기는 실망 좌절 불안 불신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기대감을 찢어버리고 의욕을 뭉개버린다. 국민적 사기를 죽이는 것이다. 개인이건, 조직이건, 국가건 구성원이 사기를 잃을 때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개혁도, 발전도 없다. 이것이 바로 국력의 붕괴현상이다. 지금 우리는 이 지경에 처해 있다.

국력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중에서 보다 중요한 것으로 국민의 정력 야망 규율 창의력 신념이 꼽힌다. 뭉뚱그려 이야기하자면 국민 사기다. 특히 우리처럼 자연자원이 빈약한 나라일수록 국민 사기보다 중요한 국력은 없다. 땅덩이는 작아도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는 ‘작지만 강한 나라’를 보면 꿈틀거리는 국민 사기를 느낄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집권층은 오히려 좌절감을 안겨주면서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지 않은가. 지난 94년 성수대교 붕괴는 한국사회의 기술 정력 규율 신념의 나사가 한꺼번에 빠지면서 일어난 국력붕괴 현상이다. 문제는 그 같은 현상이 계속 악화되고 있는 데도 집권층의 각성이 없다는 점이다.

▼길거리 무질서 국력붕괴 현상▼

해외이민이나 유학설명회가 열릴 때마다 몰려드는 인파와 ‘희망 없는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그들의 말 속에는 깊은 좌절감이 배어 있다. 성인의 40% 정도가 교육이민을 원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겠는가. 경제지표로 나타나는 설비투자의 감소현상에서도 지금 기업인들의 사기저하가 어느 정도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밤낮 없이 벌어지고 있는 거리의 무질서는 사회규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국력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기가 죽어 있는 판에 ‘항공안전위험 2등국’ 등급에 이어 ‘언론탄압위험 감시국’이란 호칭은 국민을 더욱 맥빠지게 만든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보여도 조금씩 빗물에 젖어든 흙이 끝내는 무서운 산사태를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국민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결국 국력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행위가 아닌가.

최규철ki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