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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며 생각하며]손봉숙/동티모르의 民主야, 잘 자라라

입력 | 2001-09-11 18:25:00


1999년 9월 4일. 나는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의 개표소에서 밤새 진행된 동티모르 주민투표의 개표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6시, 나를 포함한 3명의 유엔 선거관리위원에게 마침내 개표 집계가 넘어왔다. 결과는 78.5%라는 압도적 다수가 동티모르의 독립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닷새 전인 8월 30일 실시된 투표에는 주민의 98%가 참가했다. 실로 500여 년에 걸친 식민통치와 24년 동안의 인도네시아 점령을 청산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역사적인 결정이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곧바로 “이번 주민투표를 동티모르인들의 의사를 자유롭게 반영한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로 본다”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나는 엄숙한 마음으로 동티모르의 독립을 공식화하는 이 첫 문서에 정성껏 서명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서명이었다.

그 날 오전 9시, 우리는 주민투표 결과를 공식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이 마련된 마코타호텔로 달렸다. 당시 동티모르 최고의 호텔이던 마코타는 지금은 민병대의 방화로 형해만 남아 있다. 국내외 언론의 뜨거운 취재 경쟁 속에 개표 결과를 발표했다. 장내에 있던 동티모르인들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내 눈에서도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배어 나왔다. 선거관리위원들은 중립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2개월 동안 표정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기자회견이 끝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동티모르의 독립을 반대하는 민병대원들이 무차별 폭동에 나섰던 것이다. 유엔 직원들은 모두 유엔본부에 갇히는 신세가 됐고 주민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서울에 있는 가족들은 더 숨막혀 했다. 나는 민병대원들에게 포위 당해 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e메일을 30분 간격으로 날려보내면서 가족을 안심시켜야 했다. 그로부터 6주일 동안, 다국적군이 동티모르에 진주할 때까지 1000여명의 동티모르인이 목숨을 잃었고 건물의 80∼90%가 불타는 대참사가 계속됐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만 2년이 지난 2001년 9월 4일. 나는 다시 딜리 개표소에 있었다. 이번에는 동티모르 제헌의회 의원선거를 관리하는 유엔 독립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자격이었다. 2년 전과 똑같이 8월 30일에 투표가 실시됐고, 개표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개표 현황을 돌아보고 늦게 귀갓길에 올랐는데 어두운 밤길 양옆으로 수백개의 촛불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주민들은 2년 전 9월 4일을 기념하고 있었다. 이 촛불에는 독립을 보지 못하고 먼저 간 이들에 대한 아픔과 추모의 뜻이 담겨 있었다. 다시는 그런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도 들어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이 캄캄한 밤거리를 손가락 굵기의 작은 촛불이 줄지어 서서 어둠을 밝히는 모습은 차라리 애처로움이었다. 마치 신생국 동티모르의 모습 같다고나 할까. 바람에 흔들리지만 그래도 꺼지지 않고 작은 불꽃으로 남아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9월 10일 나는 ‘이번 제헌의회 선거가 공정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진행된 선거였음을 인정하는’ 내용의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선관위 보고서에 다시 서명했다. 동시에 88명의 제헌의회 의원들의 당선을 공식화하는 당선증에 역사에 남을 또 한번의 서명을 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 불쌍하고 헐벗은 국민을 걱정하면서 제발 진정한 민주주의가 정착되도록 해달라는 소망을 담아가면서. 그리고 ‘제발 한국의 정치인들처럼은 되지 말아달라’는 염원도 함께 실었다.

한국도 동티모르처럼 식민지 지배를 당한 뼈아픈 역사와 제헌의회 의원선거를 유엔 감시 하에 치른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필자가 국제선거전문가로서의 기계적인 전문성만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을 안고 동티모르에 온 것은 이들에게서 바로 한국인의 자화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50여년 동안 피 땀 흘려 노력한 보람으로 지금은 끼니 걱정은 하지 않을 만큼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우리의 소중한 경험은 나눠 갖고, 우리의 잘못된 전철은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동티모르의 선거현장을 누비고 다닌 지난 4개월은 내게 잊을 수 없는 보람을 안겨준 나날이었다.

(동티모르 딜리에서)

손 봉 숙(동티모르 유엔 독립선거관리위원장·경희대 NGO대학원 객원교수)